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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운영된 효창원 골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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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것(어보)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 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기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료."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의 발언)
 

조선 왕조는 무너졌지만 아직 마지막 왕인 순종이 살아있었던 1924년 4월 9일,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상 처음 겪는 황당한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종묘에 보관된 어보(御寶, 지금의 국새나 옥새)가 없어진 것. 어보는 왕이나 왕비, 왕세자 등이 사용한 왕실의 의례용 도장을 말한다.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국새와 같은 것이다.

당시 조선 이씨 왕가의 종묘 등 재산관리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일본 궁내성 소속 기관이 맡았다.

이왕직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 이씨를 지칭하고,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을 의미한다.

1924년 4월 13일 <동아일보> '종묘안의 절도는 오백 년 들어 처음 일'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그해 4월 9일 종묘 안 영령전(永寧殿)에 보관된 덕종과 예종의 어보가 도둑맞았다. 당일 숙직자가 있었지만 절도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어보를 찾았느냐'며 침담(잠자는 일과 먹는 일)을 잊으셨다고 전했다.

"그게 무슨 일이라고!" 골프삼매경에 빠진 이항구

순종이 잠을 못 자고 먹는 것도 잊었지만 이왕직의 핵심책임자인 2명은 골프 삼매경에 빠졌다.

<동아일보>는 "이왕직(의) 차관 시노다 지사쿠씨와 예식과장 이항구는 11일 아침부터 자동차를 몰아 용산 효창원에 이르날이 맛도록(온종일) 골프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15일 라는 기사
 동아일보 1924년 4월15일 라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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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항구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오히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며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 '이항구씨의 폭언, 이 무슨 무엄한 말이냐'라는 기사에 따르면, 그는 언론사 기자들을 모아놓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항구는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 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어치 안되는 것인데 그만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한단 말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기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료"라고 덧붙였다.

이항구 가입한 경성골프클럽, 입회비만 300원

이항구처럼 골프 삼매경에 빠진 조선인들은 얼마나 될까? 1938년 1월 1일 잡지 <삼천리>는 '서울의 상류사회, 입회금만 삼백 원 드는 골프장'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삼천리>는 기사에서 "서울의 상류사회는 화려한 품이 '그래도 서울이로구나' 할 만큼 온갖 점에 있어 뛰어나게 빛나고 있다"며 "서울 안에는 지위가 높은 당상 귀족들도 여럿 있고 수백만 원, 수십만원하는 큰 부자들도 여럿 있어 그 노는 품이 보통 우리들과는 달리 호화롭고 크코 범위가 넓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울 상류사회 놀이터인 골프 구락부(클럽), 승마 구락부(클럽) 귀족회관 차례대로 언급한 후 "조선 안에 고관과 일류명사들만을 멤버로 한 고급사교 구락부(클럽)으로 가장 세인의 흥미를 집중하고 있는 것은 경성 골프 구락부(클럽)"라고 밝혔다. 

이 잡지는 골프란 운동이 상류계급 사회에서 얼마나 크게 평가받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모 인사가 골프를 치러 동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하고 신의주에 있는 모 고관은 매주 일요일 골프를 치러 서울로 온다고 전했다.

<삼천리>는 경성골프클럽에 가입조건에 대해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이 있어야 하고, 입회비는 당시 돈으로 300원, 연회비 60원을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매월 20원 내지 30원을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삼천리>는 경성골프구락부에 입회한 회원명단을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경성골프클럽에는 보통회원 416명이 있는데 이중 조선인 43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윤치창, 윤호병, 임준부, 한상룡, 임무수, 임경순, 방태영, 박두병, 박용균, 박영근, 박흥식, 박영철, 박기효, 장병양, 조준호, 이병길, 이항구, 이정재, 이승우, 이성희, 유일한, 송성진, 고원훈, 오한영, 최진, 최남, 김한두, 김한규, 김연수, 김긍환, 김사, 김종선, 유억겸, 민대식, 민규식, 민희식, 성원경, 윤치왕, 박용운, 박용구, 박석윤, 김동훈, 김건영 등.'

당시 조선 최대 매판자본가였던 민영휘의 후손 민대식과 민규식 형제,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등 회원 대부분은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삼천리>는 이들에 대해 "그 이름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 서울 사회의 이름 날리는 큰 부호, 실업가, 옛날 도지사 다니다가 지금은 중추원에 들어가 있는 참의, 광산가, 변호사들이다"라고 설명했다.

충북 출신 김동훈·이승우는 누구?
 
경성골프클럽 회원에 가입한 김동훈이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를 지내면서 지은 충북도지사 관사 내부모습
 경성골프클럽 회원에 가입한 김동훈이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를 지내면서 지은 충북도지사 관사 내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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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골프클럽회원에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충북도지사 김동훈(金東勳)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김동훈은 충북도지사를 지낼 당시 <경성일보>에 "내선일체의 국민적 신념을 하나로 해서 자원의 개발과 산업의 발전 촉진에 전력을 기여하여 생업보국의 지성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면 국민정신 총동원을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비상시에 임하는 공복으로 중임을 새롭게 깊이 인식하고"라는 글을 싣는 등 친일행위를 했다.   그의 일본 창씨명은 카네하라 쿠니미쓰(金原邦光)로, 지금은 충북문화원으로 이용되는 충북도지사 관사를 지은 인물이다. 그가 지은 옛 충북도지사 관사는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모습을 띠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인 이승우(기리무라 세우우 梧村升雨, 1889년 8월~1955년 8월 27일)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한 뒤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변호사로 등록했다. 1925년 조선박람회 평의원으로 취임하고, 1926년 다이쇼 천황이 사망했을 때 일본 정부로부터 대례기념장을 받은 반민족행위자다.

<삼천리>가 경성골프클럽 기사를 보도한 시기인 1938년 당시, 이승우는 총독부 산하 시국대책 조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석하여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전국적인 신사참배 실시를 위해 면 단위까지 신사를 증설하고, 흰옷을 입는 풍속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장으로서 지원병제 실시 축하대회를 개최하고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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