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1 19:17최종 업데이트 22.03.0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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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서울 중구 정동 천주교 성프란치스코 회관에 비치된 김순악 할머니의 명판. ⓒ 강성국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꼬, 요시코, 마츠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포개어지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름들을 나열한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부르는 한 사람의 다른 이름들.

박문칠의 <보드랍게>는 위안부 김순악(1928~2010)이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삶을 되새겨야만 한다고 한다. 저 이름들은 왜 되새겨져야만 하는가. 박문칠은 지금까지의 위안부에 대한 시선에는 어떤 결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미디어 심지어는 위안부 운동이 위안부들을 그려내거나 도식적으로 규정했던 모습은 피해자 소녀와 할머니 투사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간극이 있다. 소녀와 할머니의 간극. 피해자와 투사의 간극. 즉 시간의 간극과 전환의 간극.

한국 사회는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이 간극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말은 한국 사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해자에서 투사가 되기를 욕망했지만 정작 그들의 치유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저 이름들은 왜 되새겨져야만 하는가. 저 이름들로 불렸던 삶을 이해하는 것만이 그동안 결여되었던 치유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김순악의 삶

1928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김순악은 16세가 되던 해에 대구의 면직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동네 아저씨의 말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김순악은 면직 공장이 아닌 직업소개소로 보내졌고 그곳의 남자들은 김순악을 일본군 '위안부'로 팔아넘긴다. 김순악은 하얼빈, 베이징을 거쳐 장커우까지 끌려가 평일에는 5~6명, 토요일 일요일에는 30~40명씩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던 위안소의 지옥같은 시간을 버티어 낸다.
 
일본 사람 있을 때도 유곽 있었고, 그 유곽을 조선 유곽으로 맨들어 가지고 조선 사람이 조선 유곽을 하고 있드라고 조선 여자들 모집해 놓고…

해방 후 김순악은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김순악은 고향에 갈 차비조차 없어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한다.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소개소를 통해 도착한 곳은 '유곽'이었다. 일본인의 유곽이 있던 자리는 해방 후 포주만 조선인으로 바뀐 조선 유곽으로 바뀌고 위안부였던 김순악은 소위 이미 '버린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매춘부가 된다. 전쟁과 식민주의가 김순악을 위안부로 학대했다면 해방된 조국의 가부장 사회는 매춘부로 내몰아 착취한 셈이었다.

유곽의 몸 파는 일에도 지치고 고향에도 갈 수 없던 김순악은 전라도 여수 요릿집에서 일하며 지내다 그곳 순경과 관계해 임신한다. 그러다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만삭의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어머니는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며 타박할 뿐이다. 한국전쟁 후 김순악은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어머니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고, 동두천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기지촌 색시 장사를 하는 '마마상'으로 살게 된다. 
  

김순악 할머니의 생전 모습. ⓒ (주)인디플러그

 
한국전쟁 이후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병사들의 '전장 피로 해소'와 '여가'를 위해 한국 측에 유흥 조성을 공공연히 요구했다. 외화벌이가 절실했던 당시 우리 정부는 여기 부합해 공공연히 기지촌 운영을 허가했다. 뿐만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을 한국정부 '위안부'로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순악의 삶은 일제강점을 기점으로 뒤틀려버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둡고 낮은 곳에서 가까스로 생존해 버티어 내는 삶이었다.
 
아가씨나 머슴애나 어린애나 내 눈에 뵈기 싫어. 그렇게 사람을 안 만나고 싶다카이…내 얘기하면 '하이고, 참 애먹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김순악의 노년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16살부터 일본군 위안부로, 해방 이후에는 기생, 한국전쟁 이후에는 기지촌 마마상으로 사회에서 포용되지 못하고 가족들과도 단절되었다. '미친개', '술쟁이', '깡패 할매' 같은 이름이 말해주듯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술에 의지해 겨우 잠이 드는 괴팍한 성격의 노인으로 외롭게 노년을 보냈다.

일본의 가혹한 전쟁 범죄와 한국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폭력을 몸뚱이 하나로 버텨야 했던 김순악이 사람들에게 벽을 쌓게 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녀의 일생을 덮친 모든 폭력에 누구 하나 '고생했다. 애먹었다'라고 '보드랍게' 위로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가 귀국해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는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대구·경북 지역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했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연대하며 자신의 피해 사실과 생애를 증언했다. 김순악은 2010년 사망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위안부 역사관 건립 씨앗 기금과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데 기부했다. 그녀의 유언은 '나를 잊지 말아 달라'였다.

계몽이 아닌 연대

이미 세상을 떠난 김순악의 삶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준비하며 박문칠이 마주하게 된 난관은 김순악의 대부분 기록들이 음성과 녹취록, 구술 사료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문칠은 다큐멘터리가 구술 사료들로 덮여 씌워진 아카이브 푸티지(footage, 장면) 덩어리로 만들어져 버릴 수 있는 위험, 그래서 김순악의 삶이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로 박제되어 버리고 그것 자체가 다큐멘터리가 되는 상황을 정말로 절실하게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드랍게> 중 김순악의 삶을 낭독한 박혜정 ⓒ (주)인디플러그

 
그래서 박문칠이 선택한 전략은 김순악의 삶을 낭송(recite)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문칠은 놀랍게도 이 낭송의 주체로 미투(me too) 운동 폭로 당사자들을 초대한다. 이 피해자들은 마치 강령술(necromancy)과 같이 김순악의 이름들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김순악의 증언들을 직접 낭송함으로써 김순악의 삶을 끝나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김순악의 삶과 말을 통해 생사를 뛰어넘어 연대하고 위로받는다.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와 미투 당사자들을 그저 피상적으로 대면시켰다면 자칫 위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드랍게>라는 따뜻할 뿐만 아니라 뛰어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던 것은 박문칠이 다큐멘터리가 '계몽'이 아닌 '연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보드랍게>가 관객들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2년 전인 2020년 5월에 개최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였다. <보드랍게>는 영화제에 참가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지지받았고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하는 성과도 거두었으나 아쉽게 영화제 이후 일반 관객에게 소개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여기에는 두 가지 난관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다른 영화들도 처한 동일한 상황으로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라 극장 개봉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난관은 <보드랍게>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으로 2020년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따른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사용 및 공시 논란(공교롭게도 <보드랍게>는 정확하게 이 사태와 거의 동시에 전주국제영화제에 공개되었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복잡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소 긴 시간을 돌아오기는 했지만 <보드랍게>가 지난 2월 23일 개봉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원예압화작품 '평화'를 만들고 있는 김순악 할머니. ⓒ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

 
덧붙여.
 
전쟁은 없어야 된데이, 난  (평화) 이 글자가 참 좋다.

김순악은 전쟁 범죄의 피해자로 생존한 뒤 여생 동안 평화를 한없이 바랐다. <보드랍게>의 개봉 다음날인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김순악이 평화를 염원했던 마음과 같이 우크라이나 민중들에게 하루빨리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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