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청주시 상당산성 국유지에 남아있던 친일파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 2019년 12월 모습
 청주시 상당산성 국유지에 남아있던 친일파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 2019년 12월 모습
ⓒ 충북인뉴스

관련사진보기

 
2019년 12월 당시 안유풍 묘 전경
 2019년 12월 당시 안유풍 묘 전경
ⓒ 충북인뉴스

관련사진보기

 
철거된 안유풍의 묘지 전경(2022년 2월 26일 촬영)
 철거된 안유풍의 묘지 전경(2022년 2월 26일 촬영)
ⓒ 충북인뉴스

관련사진보기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국가에 귀속된 청주시 상당산성 토지에 남아있던 친일파 민영휘의 둘째 부인 안유풍의 묘가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 26일 <충북인뉴스> 취재 결과, 청주시 산성동 산28-1번지에 위치한 안유풍의 묘와 석등, 묘지석이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묘지터에는 안유풍의 묘와 일본풍 석등, 묘지 기단과 묘지석 등 석물들이 존재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다. 묘지터를 살펴본 결과 누군가가 안유풍의 묘와 석물 등을 이장한 것으로 추정됐다.

사라진 안유풍 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소는 크기부터 남달랐다. 봉분 높이가 2m 가량으로 높고 크다. 원숭이 모양의 석물 2점, 상석, 석등이 묘를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묘지 주변과 묘지로 가는 길목에는 단풍나무로 배치돼 있다. 이 나무는 청주지역 최고의 단풍나무로 평가받았다.

이곳에 설치된 석물은 일본풍이거나 일본풍과 조선전통양식이 혼합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영희 전 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는 "이곳에 있는 석등은 전형적인 일본 양식"이라고 밝혔다. 또 "원숭이 모양의 석물은 조선 전통 양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한 일본식도 아니다. 적당히 혼합돼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유풍의 묘가 사라진 이유는?

안유풍의 묘가 자리한 충북 청주시 산성동 산 28-1번지는 면적만 44만1390㎡에 달한다. 해당 토지는 민영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청주시가 지분의 1/3, 국가가 2/3를 소유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에 귀속됐지만 안유풍의 묘는 계속 존재했다.

이런 사실은 <충북인뉴스>의 보도로 알려졌다. 2019년 12월 11일 <충북인뉴스>는 <친일파 민영휘의 첩 안유풍 묘, 국가·청주시 땅에 '삐까번쩍' 건재>하다는 제호의 기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보도 이후 안유풍의 묘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하지만 청주시는 상당산성 내에 설치된 친일파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를 철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청주시청 관계자는 "안유풍의 묘 이전과 관련한 법률 검토 결과 분묘 기지권에 해당된다"며 "후손들이 이전하지 않는 한 청주시가 강제로 철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철거전 안유풍의 묘에 남아있던 왜색풍 석등
 철거전 안유풍의 묘에 남아있던 왜색풍 석등
ⓒ 충북인뉴스

관련사진보기

 
철거전 안유풍 묘지에 설치된 석물
 철거전 안유풍 묘지에 설치된 석물
ⓒ 충북인뉴스

관련사진보기


'분묘 기지권'이란 타인의 토지 위에 분묘를 소유하기 위해 분묘의 기지부분의 토지를 사용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관습으로 인정되는 지상권 유사의 물권을 말한다.

판례에 따르면 토지소유자의 승낙을 받지 않고 묘지를 설치했다고 하더라도 20년 이상 지속됐다면 분묘기지권이 발생해 토지소유자가 임의로 처분할수 없다. 또 원래 자기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후 소유권을 처분했다고 하더라도 '묘 이전'과 같은 별도의 약정이 없다면 이때도 분묘기지권이 발생한다.

청주시의 해명과는 달리 취재결과 청주시는 안유풍의 묘에 대해 강제철거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유재산법' 제7조 ②항에는 '행정재산은 「민법」 제245조에도 불구하고 시효취득(時效取得)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돼있다. 안유풍의 묘가 있는 토지가 국고에 귀속돼 행정재산에 해당되는 만큼 분묘기지권도 적용제외 대상이었던 것이다.

친일파 민영휘와 안유풍은 누구?

민영휘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악명 높은 친일파다. 2007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포함됐다.

민영휘의 본관은 여흥이고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다.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산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1907년 친일보부상 단체인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장으로 선출됐다. 그해 10월에는 한국을 시찰하러 온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한 신사회(神士會) 환영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주도했다. 그 공로로 1909년 일본정부가 주는 '일본황태자 도한 기념장'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청원서'와 경쟁하기 위해 이완용이 중심이 돼 결성한 '국민연설회' 총대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의 국권피탈에 앞장선 공로로 1910년 일본 황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7월 일본 정부가 주는 금배(金杯), 11월에는 은배(銀杯)와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안유풍은 민영휘의 첩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최대 갑부였던 민영휘의 여성 편력은 화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영휘의 정실부인은 '대방(大房)마마'로 불렸던 신씨(申氏)였다. 신 씨와는 사이에선 아들이 없었다. 민영휘의 첩인 안유풍은 '해주마마'로 불렸다. 민영휘에겐 이 외에도 평양마마, 연당마마 등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

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엔 대식‧천식‧규식의 세 아들이 있었다. 셋째 아들 민규식은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거물 친일파가 된 것이다.

1935년 12월 말, 민영휘가 84세 되던해 사망하자 당시 잡지 삼천리는 <1천 2백만원이라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민영휘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휘문학원을 설립한 인물. 그의 첩이었던 안유풍은 현 풍문여고를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론 1936년 안유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유훈'이라며 설립자금을 내고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풍문여학교를 설립하면서 안유풍의 '풍자'를 따 풍문학원이라 이름을 지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북인뉴스는 정통시사 주간지 충청리뷰에서 2004년5월 법인 독립한 Only Internetnewspaper 입니다. 충북인뉴스는 '충북인(人)뉴스' '충북 in 뉴스'의 의미를 가집니다. 충북 언론 최초의 독립법인 인터넷 신문으로서 충북인과 충북지역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정론을 펼 것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