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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은 보통 집안의 어른이 자녀들이나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나 교훈을 말한다. 16세기,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해 가는 시기에 사대부들은 선조들의 가업을 이어받아 집안을 일으키고 자녀들에 대한 유교적 교육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가훈을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준다.

이러한 가훈은 전통사회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유교적 이념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가훈은 정훈, 가범, 가헌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있어 왔는데 조선시대를 넘어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을 만큼 역사가 깊다. 가훈 중에는 후손들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넘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지침서나 그 집안의 학문적 성향인 가학의 성격까지도 들어 있어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유희춘의 가훈서 '정훈'
 
유희춘은 후손들이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훈을 썼는데 정훈에는 십훈, 내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암박물관>
▲ 유희춘이 쓴 "정훈" 유희춘은 후손들이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훈을 썼는데 정훈에는 십훈, 내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암박물관>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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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은 집안의 가훈서인 '정훈庭訓'을 남겨 후손들이 이를 지표로 삼기를 원하였다. '정훈'은 1559년(명종14) 유희춘이 저술한 가정교훈서다. 유희춘의 '정훈'은 미암의 시문집인 <미암집> 제4권에 실려 있는데 정훈에는 십훈, 정훈내편, 정훈외편 상·하가 수록되어 있다.

유희춘의 정훈 첫 부분에는 십훈(十訓)이 기록되어 있다. 유희춘은 십훈을 기록한 것에 대해 선친인 유계린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는 일찍이 가르침을 잃어버려 항상 하늘이 끝나는 듯한 아픔을 품었으며, 또 불초하여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였다. 지금 적지 않으면 다 없어질까 두려워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이 집안에서 독실히 행하신 10조를 기록하여 날마다 경계를 더하고자 정훈을 짓노라" 하였다.

유희춘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함께 그 뜻을 이어받아 자식들의 벼슬길을 경계하며 집안의 가업을 이어가고자 하는 심정이 잘 느껴진다.

정훈 내편에는 집안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교훈이 정리되어 있고, 정훈 외편에는 관리들이 벼슬할 때와 고을을 다스릴 때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를 보면 유희춘의 정훈은 단순한 가훈서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훈 외편에는 관직에 있는 관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일들을 말하고 있는데 훗날 목민관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연상시킨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목민관의 지침서로 유명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유희춘의 정훈에서도 당시 목민관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잘 정리하고 있어 새삼 주목을 받게 한다.

널리 직언을 구하여 사람을 쓰라
 
미암집 제4권 정훈외편에는 목민관들이 지켜야할 지침서가 수록되어 있다.
▲ 미암 유희춘의 시문집인 미암집, <미암박물관>  미암집 제4권 정훈외편에는 목민관들이 지켜야할 지침서가 수록되어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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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의 정훈 외편 3, 4장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일 곧 정치가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제3장은 '목민청송牧民聽訟'이라 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송사(訟事)를 잘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의 말을 잘 새겨듣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4장에서는 '구언용인求言用人'이라 하여 널리 직언을 구하여 사람을 쓰라고 말한다. 아첨하는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직언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현장에서 잘 청취하라며 유희춘은 자신이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의 경험을 얘기한다.

"내가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방榜을 내어 구언求言을 했는데, 교생校生들의 말이 대부분 채택할 만하였으니 대개 사람이 많은 곳에 공론公論이 있는 것이다."

공론 즉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것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늘날의 위정자(정치인)들이 한번쯤 되새겨 봄직한 이야기다. 유희춘의 정훈을 통해 보면 수신제가라는 가족윤리 뿐만 아니라 당시 관리들이 지켜야할 것들에 대해서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어 정훈이 갖는 의미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산 윤선도가 남긴 '충헌공 가훈'
 
층헌공 가훈은 아들 인미에게 써준 가훈서로 고산의 실천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 고산 윤선도의 충헌공 가훈 층헌공 가훈은 아들 인미에게 써준 가훈서로 고산의 실천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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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과 사돈 관계를 맺은 해남윤씨 집안에는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아들 인미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충헌공가훈'이 있다. 유희춘보다 약간 후대이기는 하나 비슷한 시기의 가훈서라 할 수 있다.

충헌공 가훈은 1660년 고산이 74세에 멀리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떠나면서 아들인 인미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남긴 교훈서다. 유배지로 떠나면서 쓴 것이니 자신의 절박한 심정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고산유고에는 기대아서寄大兒書라고 되어 있다.

충헌공 가훈에는 집안의 자녀나 후손들이 집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정리한 지침서라 할 수 있지만 가훈 곳곳에서는 이 집안의 실천적이고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가학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충헌공가훈에서는 소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적선積善'과 '근검'이 집안의 융성을 위한 최고의 덕목임을 내세우고 이를 꼭 지켜나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한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적선을 하는 데에 있다며 수신과 근행勤行으로 적선하고 인자한 행실을 제일 급선무로 여기라 한다.

그리고 적선을 하고 하지 않는 것에 따라 대가 끊기고 이어지는 것이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적선을 강조하였다. 당시 유교 사회에서 지향하는 윤리의식이 어떤 것이었나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충헌공 가훈에서는 의복이나 말 등 몸을 치장하는 모든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여러 번에 걸쳐 노비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우대해주고 구휼해 주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노비에게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그동안 기준이 없던 것을 노奴는 평목平木 2필, 비婢는 한필 반으로 하고 역役이 많은 사람은 역을 덜어주고 부자는 더하지 않는다고 그 기준을 정해주고 있다.

충헌공 가훈은 고산이 추구하고자 했던 실천윤리이기도 하다. 이를 잘 지켜 집안이 계속 번성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시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이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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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 <민속원> 2012년, '녹우당'<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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