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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리 안보에 대한 관심 역시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 유사시'에 관한 의제가 지난 25일의 대선토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숱하게 한반도 위기를 겪어왔던 한국인들에게 있어,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고 있는 '유사시'의 상황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차기 지도자가 어떻게 우리의 안전보장과 평화를 지켜낼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안보는 생존의 문제다. 대선토론 자리에서 각 후보들이 냉정하게 현실의 정세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안보대책을 논의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이 언급됨과 동시에 '한반도 유사시'라는 주제는 급기야 '친일'이냐 '애국'이냐는 사상검증의 수단으로 흘러가버렸다.    

"한미일 군사동맹에 참여해서 유사시에 일본이 한반도에 개입하게 할 생각은 아니지 않느냐"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포문을 열었던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유사시에 한반도에 일본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건데 그걸 하시겠느냐?"며 거듭 윤 후보를 몰아붙였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입장을 밝힌 윤석열 후보의 발언은, 급기야 언론을 통해 '유사시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됐다(관련기사: 윤석열 "유사시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올 수도 있지만").

민주당은 윤 후보가 '한반도에 일본군이 진주할 수 있는 취지'로 발언했다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각 언론보도들 역시 '일본군'이라는 단어가 강조된다. 정작, 윤 후보의 한미일 군사동맹 검토 발언에 날을 세웠던 심 후보를 포함해 그날 토론자리에 있던 이들 중 누구도 "일본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음을 상기해본다면 당혹스러운 일이다.  

먼저 사실 관계부터 바로 잡자. 1945년 11월 30일을 기해 일본 육해군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일본군은 법적으로도 실체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자위대라는 무장조직이 존재하며 국방의 업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자위대는 결코 일본군이 아니다.
 
일본군은 천황에게 통수권을 위임받았다는 명분으로 문민통제를 거부했다.
▲ 쇼와 천황의 앞에서 회의하는 일본 육해군의 지도자들 일본군은 천황에게 통수권을 위임받았다는 명분으로 문민통제를 거부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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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패전으로 해산된 일본군은 '일왕(천황)의 군대'였다.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을 제국 일본의 유일한 주권자로 규정했고, '통수권'은 오직 제국의 주권자인 천황에게만 주어졌다. 군부는 통수권을 천황에게 위임받았다는 명목으로 내각의 문민통제를 거부했다. 이들은 일본의 국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군비증강을 추진했고, 내각의 승인없이 숱한 대외전쟁을 도발했다.

이러한 폭주를 제어하려는 시도들은 '천황폐하의 신성한 통수권을 범하는 역적행위'로 비토됐다. 현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육해군대신의 사임은 군부가 내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더 나아가, 과격파 군인들은 상기의 '역적'들을 살해하거나 심지어는 정변을 벌이기도 했다.

내각은 '일본군'의 폭주에 무력했다. 일본을 파멸로 이끌었던 태평양 전쟁조차도, 미국의 요구대로 중일전쟁을 포기하고 육군을 철군시키면 내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의 협박에 못 이겨 강행된 것이었다. <쇼와 육군>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작가의 분석대로, 당시의 일본군, 특히 육군은 자신들이 속한 일본이라는 국가를 뛰어넘는 전쟁 수행의 몸통이었다.

그러므로, 패전 후 일본에서 일본군이 해산된 것은, 일본을 군사적으로 제기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한 연합군 사령부의 압력도 주요한 것이었지만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이후 냉전 질서의 급류 속에서 자위대가 창설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정으로 자위대는 결코 일본군이 될 수 없었다. 일본군의 폐단을 교훈으로 삼은 현대 일본국은 자위대에 대한 문민통제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본육군 항공대 장교 출신의 역사학자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교수는 저서인 <천황의 군대>에서 자위대가 미군에게 종속돼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국회로부터의 통수권'보다 미군이 요구하는 '작전준비'가 더 우선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자위대를 임의로 운용하는 것조차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위대는 법적으로도 실체적으로도 일본군과 구별되며, 사실상 미군에 종속된 조직으로 평가된다.
▲ 주일미군과 육상자위대원(2009년) 자위대는 법적으로도 실체적으로도 일본군과 구별되며, 사실상 미군에 종속된 조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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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일감정을 선거에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명백한 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일본이 미국의 동의 없이 운용할 수도 없는 현실의 자위대 대신, 이미 해산돼 존재하지도 않는 일본군이 호명되고 있는 것은, 과거 침략전쟁의 주체였던 일본군의 이미지를 국민들의 뇌리에 불러내어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선거 전술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당연히, 현실을 곡해하면서까지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 선거 전술은, 장기적으로 한일관계와 동북아 질서 위에 악영향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한국전쟁'이라는 희대의 '한반도 유사시'에 개입한 역사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전쟁에 투입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지지만, 한국도 일본도 미국의 산하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개인의 의사는 무력했다. 일본 해군의 잔존 소해부대는 미군의 지도 하에 한반도 연안의 기뢰 제거 작업에 투입됐고, 심지어 일부는 육지에서 전투를 치르기까지 했다.

일본이나 한국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북한의 남침 이래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였던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피가 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의 흥망이 한반도에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듯이, 한반도 유사시라는 상황 역시 일본에게 중차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웃국가의 운명이 얽히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일본의 존재 자체를 적대시하고 한반도 유사시라는 가정에서 일본을 지운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아래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국가적으로도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태그:#일본군, #자위대, #한반도 유사시, #한미일,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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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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