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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재택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책을 빌려오겠다고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오는 길, 단지 안 공원에서 청설모를 만났다. 휠체어를 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둔 데크 난간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

'너는 숲멍을 하는구나. 나는 바느질멍을 하는데.'

혼자 친밀감에 마스크 속에서 조용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느질이라는 산뜻한 기쁨 
 
너는 숲멍을 하는구나.
▲ 청설모 너는 숲멍을 하는구나.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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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움직임은 적고 머리만 열일하던 평일을 지나 주말이 오면 바느질을 한다. 주중에 보지 못했던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페달을 밟아 재봉틀을 작동시키는 발과 노루발 밑으로 천을 밀어넣는 손의 협업만으로 박고, 다리고, 박고, 다리는 작업의 반복이다. 이 때 머리는 별주부전의 토끼가 씻어서 햇볕에 말려놓는다는 간처럼 내 몸 속에 있어도 없는 것이다.

재봉틀이 만들어내는 바늘땀이 예뻐서 홀린듯 신나게 재봉틀을 밟다가 잘못 박은 걸 알게 되면 뜯기도 한다. 사실은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드르륵 박는 건 쉬운데 잘못 박은 걸 뜯는 데는 몇 배의 시간이 걸린다. 후루룩 뱉기는 쉽지만 잘못 던진 말을 주워담고 뒷일을 감당하는 게 몇 배나 수고스러운 인생사의 축소판인가 싶다.

머리가 복잡할 땐 직선바느질이 약이다. 답이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꽉 막힌 듯 답답할 때 분명한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집을 풀면 머리가 좀 맑아진다는 사람들에게 수학 문제집이 힐링이듯, 긴장감 팽팽하고 정답도 없는 인생사의 파고를 넘다 지쳐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하다가도 두 겹의 천이 직선 박음질로 정확히 이어지는 걸 볼 때 나는 다시 산뜻한 기분이 된다.

원단장에서 사각거리는 고밀도 천을 찾아다가 강화마루 쪽판의 직선을 가이드 삼아 정확히 재단을 한 다음(평행과 직각을 맞추는 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ㄷ자 모양이 되도록 박고 뚫려 있는 면을 두 번 접어 박으면 간단한 베갯닛이 완성된다. 바느질하는 시간 자체가 힐링인데 작업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가족들이 뽀송뽀송한 호텔 침구의 감촉을 느끼면서 베고 잘 수 있는 베갯닛이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는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하나 주문하고 말지 언제 그걸 만들고 있나 싶어 답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한번도 끄지 않고 가동하던 노트북의 전원을 꺼서 열을 식혀두는 것처럼, 뇌는 꺼두고 바느질멍을 하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나에게는 안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부캐의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베갯닛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더라? 분명 책에 나온 설명을 보고 만들지만 내가 해도 같은 결과물이 나올까 반신반의하느라 만드는 과정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앞에 보이는 길에 내가 모르는 함정이 있을까, 돌다리가 무너질까 한 발 내딛기가 두려운 사람마냥 긴장하면서 만들었다.

완제품을 사는 것보다 돈을 덜 들이고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기만을 기대하며 만들기에 집중했다. 바느질할 때도 뇌를 풀가동 하던 시절에는 만드는 과정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못 만들던 나에서 만들 줄 아는 나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에 바느질을 이어갔다.

어른이 된 후에는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다. 날 때부터 어른이었을 리 없으니 어른이 되기 전까지 성장이야 계속했겠지만 그때는 자라느라 바빠서 자라고 있는 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달까. 그렇게 본캐가 성장을 멈춘 와중에 특정 분야에서 초보가 됐다. 배우고 실수하고 실수를 만회하려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때로는 손과 눈이 고생을 하면서 뒷수습을 하다가 실력이 느는 경험을 통해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부캐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 나이에도 뭔가를 배우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썩 괜찮은 체험이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신선한 자극, 성장하는 나를 지켜보는 즐거움을 지나 만드는 시간과 절차 자체를 즐기는 시기에 도달했기에 바느질은 이제 나에게 휴식이고 평안이다. 하지만 때론 바느질로도 다스려지지 않는 풍파도 있었다.

나의 평온을 재는 바로미터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서울 변두리 동네의 쌈직한 아파트에 살고 있던 나는 부동산 공부를 하지 않고 안일하게 집을 선택해서 가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라도 집을 갈아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도무지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사고 싶은 집을 살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아서 애가 탔다.

A4용지를 두 번 접어 4등분한 뒤 살고 있는 집을 팔 때, 사고 싶은 집을 살 때, 경우의 수를 바꿔가면서 최고의 시나리오,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고 또 쓰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계산해보느라 한 달 동안 박음질 한 줄도 박지 못했다. 아니 바느질의 'ㅂ'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사를 들어갈 수 없으면 작은 집에 월세를 살면서라도 집을 사놓자고 남편을 설득하고 그러려면 짐을 얼마나 줄여야 하나를 계산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전세가 낀 집이라도 사두자고 거래에 나섰을 때는 마침 정부가 양도세 중과를 한시적으로 유예해준다고 할 때였다.

집을 팔기는 팔아야겠는데 들고 있으면 값이 오를 것이 너무나 보였던 매도자는 좀처럼 계좌번호를 내주지 않았다. 내놓은 집값에서 2000만 원을, 또 1000만 원을 더 달라고 하고 고민 끝에 수락하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2500만 원을 더 불렀다. 그렇게는 힘듭니다, 포기했다.

그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설에 친정에 갔을 때 집값이 오를 때만이 아니라 하락기도 경험해 본 아버지는 내 고민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됐고. 남의 것 보지 말고 네가 가진 것으로 만족해라. 너 그 정도면 잘해 왔다. 사람이 대출에 쪼들리면 인생이 팍팍하다. 아직 시작도 안 된 재건축 바라면서 들어가 살면 세월이 안 간다."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추월 좀 해보겠다고 액셀을 아무리 밟아도 속도는 나지 않고 과열되어 터지기 직전의 모터 같던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졌다.

작지만 있을 것만 있는, 시끄럽고 번거로워서 싫어하는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걸레로 감당할만한 크기의, 공들여 내 취향에 맞춰둔, 지금 내 경제 규모에 무리가 없는 우리 집이 보였다.

비로소 장에 넣어두었던 재봉틀을 꺼내 주말 작업실을 차릴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바느질한 옷을 가족들에게 입히고 착샷을 찍고 까르르 웃던 시간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부캐를 성장시켜온 지난 10년은 내가 아주 평온했던 시간이구나.

이제는 머리를 비우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바느질 시간 자체가 내게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다. 바느질을 하는 일 자체가 힐링이 된다는 것뿐 아니라 주말에 느긋하게 일어나 만들고 싶은 옷을 떠올리고, 패턴을 베껴 그리고 옷감을 재단해서 바느질을 할 수 있는 건 내 마음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거치고 나서는 옷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입히고 착샷을 찍을 때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한 주 잘 지냈구나. 지금이 나와 우리 가족의 화양연화로구나 의식하고, 그 순간을 관찰예능을 찍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한 번 더 음미하려 한다.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바느질을 하고 싶을 때 나는 힐링이 필요한 상태다. 안감이 들어간 재킷이나 코트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에너지가 짱짱하게 차 있다는 뜻이다. 바느질을 할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마음이든 몸이든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침대에 등이 눌어붙은 듯 뒹굴뒹굴하는 시간을 갖되 '너는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준다.
 
마음을 산뜻하게 해주는 직선바느질의 산물
 마음을 산뜻하게 해주는 직선바느질의 산물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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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도 나는 침대 커버를 만들고 남은 광목 원단 자투리를 곱게 접어 박아 행주를 만들었다. 작년부터 만들어 입어야지 마음을 먹고 패턴이며 원단을 다 구비해서 원단장에 쟁여둔 트위드 재킷을 건드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 재단해 놓은 바지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직선바느질에 손이 갔다.

지금은 바느질멍 힐링이 필요한가보다, 바로미터가 가리키는 나의 눈금을 읽어준다. 그러니 트위드 재킷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나를 닦달하지 말아야지.

나에게는 내 마음의 평온을 재어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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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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