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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새 학기를 맞이하는 분주한 달이다.
 2월은 새 학기를 맞이하는 분주한 달이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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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새 학기를 맞이하는 분주한 달이다. 교직자라는 직업인으로서는 '인사 이동'의 달이기도 하다. 한 학교, 교사 근무 최대 연한은 5년이다. 물론 여타 이유로 5년 이내에 학교를 옮기기도 하지만,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5년을 채운다.

이번에 기존 학교에서 5년 만기를 채우고 다른 학교로 인사 발령이 났다. 정식 복무 시작은 3월부터지만, 새 학교 적응 및 신학기 준비로 2월 중순 이후부터는 출장을 달고 새 발령지에서 근무한다.

학교도 낯설고 사람들은 더 낯설다. 낯을 잘 안 가리는 편이었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것도 좀 변하는가 보다. 익숙한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선택권이 제한된 직업적 인사 이동에는 객기라도 쥐어짜 새로운 환경과 만나야 한다.

새 학교, 새 교직원들 간의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길만이 전입 교사의 살 길이다. 무난하게 융화되기 위해 필요한 건 아이큐보다는 '눈치큐'다. 경력도 많으니 알아서 잘할 줄 알았더니 혼자 구멍이더라, 신세가 되지 않으려고 기존 멤버들의 화법과 문제 처리 방법 등을 눈치껏,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넘겨받은 우리 반 아이들 명단을 보니 번호 순서가 이전 학교와 다르다. 이전 학교에서는 학생 번호가 생년월일 순이었는데 이곳은 성별로 나눠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부여한다. 영 어색하다. 

익숙하지 않은 업무 배정부터 턱없이 적은 횟수의 재활용 분리수거일까지(분리수거 일이 한 달에 단 2회라니!), 이전 학교와 다른 시스템을 숙지하는 데 또 얼마나 헤맬까? 23년 차 베테랑 교사는 어디 가고, 교실 환경정리까지 깔끔히 마친 옆 교실을 흘낏 보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그 일 

그러던 중 이전 학교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내가 맡았던 업무에 대한 2022학년도 계획서를 교육청에 제출해야 한다는 거다. 새 학년도 학년 및 업무 배정된 지가 언제인데, 새 학년도 계획서를 전출자에게 해 달라니. 이 무슨 얼토당토않는 말인가?

혹시 공문을 배정하는 실무사가 업무 담당자가 바뀌었음을 모르고 잘못 보낸 건가 싶어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예기치 못한 학교의 사정으로 신학기까지 그 업무가 공석이 된 상황이었다. 업무 담당자는 없지, 교육청에 계획서는 제출해야지, 중간 관리자까지 모두 전출 가셨지... 중간에서 업무 배정을 하는 실무사도 나름 고민이 깊었던가 보더라.

업무 인수인계까지 다 끝난 마당에 새 학교에서 할 일도 태산인데 이전 학교 업무까지 신경 쓰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내내 신경이 쓰이긴 했다. 제출 기한 마감일이 되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전 학교 실무사에게 다시 확인해 보니, 아직도 업무 담당자 배정이 안 되었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계획서를 작성했다. 이전 학교에서 계속 맡아오던 일이어서 작성하는데 실상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후다닥 기안 결재까지 올리고 결국 이럴 걸, 뭘 그렇게 비싸게 굴었나 싶었다.

누군가 처음으로 이 업무를 맡았다면 많이 헤맸겠구나. 결국 그 사람이 이전 업무 담당자인 내게 전화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답해 주는 시간도 이보다 적게 걸리진 않았겠다. 익숙한 일을 어렵지 않게 처리하고 나니 묘하게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새 학교에서 어리바리하게 눈치 보던 며칠간, 나도 모르는새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전 학교 동료 S와 K, 두 사람과 함께 등산을 간 적이 있다. S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K는 7살 아래였다. S는 몇 년 전 암 진단을 받고 식생에 주의하며 치료 중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되도록 무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K는 유능한 부장 교사에 학교에서는 누구보다 총명한 일꾼이다. 일머리가 빠르고 일처리 속도는 더 빠르다.

난 당연히 K가 S보다 훨씬 등산을 잘 해낼 거라고 예상했다. 함께 등산을 해 보고서야 내 판단력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는지 알았다. S는 너무나 가뿐히 산을 올랐다. 학교에서는 자주 위태롭게 보였는데 자연 속에서 S는 전에 없던 에너지로 넘쳐났다.

반면에 K는 학교에서 보였던 파워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지 등산 초반부터 힘겨워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숨이 턱까지 차 올라 "죽겠다"는 말을 연발했다. 힘들어하는 K를 위해 우리는 자주 쉬고 천천히 오르며 서로의 바뀐 처지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자주 웃었다.

몇 년을 알았더라도 일정한 장소에서만 만나보았다면 그 사람을 다 안다 말할 수 없다. 지금 자신이 처한 시기, 한 공간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자신의 전부는 아니다. 유현준 교수는 저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제약'은 언제나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했다.

현재 내 앞에 놓인 제한된 조건에 당장은 불편하고 힘들 수 있다. 내 모든 능력치를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나에게 조금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조급함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자기 인정과 자기 미화의 판타지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 특정 종류의 애매모호함을 필요로 한다.
-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류 산텔라

애매모호한 순간에 나를 위축되게 하지 말자. 한 여름 불꽃처럼 살다가는 매미조차도 5~7년을 별 쓸모없어 보이는 번데기로 버텨내지 않던가. 더 큰 감동을 위해 모호한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태그:#새학기, #인사이동, #직장생활, #교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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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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