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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나를 정말 힘들게 한 사람이 있었다. 악성민원인이었던 그는 겨울부터 가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민원을 넣었다. 집에서는 회사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의 민원은 민원을 넣은 당사자만큼이나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저녁을 먹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심지어 꿈에서도 생각이 났다.

두 시간 동안 욕설 섞인 전화를 받은 날, 새벽 3시에 벌떡 잠이 깼다. 다시 잠들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민원인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폰을 열어 쓴 글이 에세이집 <별일 없어도 내일은 기분이 좋을 것 같아>에 실린 '네 생각'이다.
 
자 지금부터 생각을 멈춰보자.
잠깐,
생각하지 말라니까
또 생각을 하고 있네.
안되겠다.
생각을 돌돌 말아서
고무줄로 꽁꽁 묶은 다음
툭 던져버리자.
(중략)
에라 모르겠다.
그냥 계속 나오라 그래.
그러다 지치면 끝나겠지.
자꾸 네 생각나는 거.

- 별일 없어도 내일은 기분이 좋을 것 같아 <네 생각> 중

짝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썼음직한 이 글이 실은 날 괴롭히는 민원인을 생각하며 쓴 글이라는 말에 친구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더 집요한 감정이라는 걸.

마음의 '배수구' 역할을 해주는 글쓰기
 
좋을 때뿐 아니라 힘들?때도 글을 쓴다.
 좋을 때뿐 아니라 힘들?때도 글을 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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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뿐 아니라 힘들 때도 글을 쓴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상처받은 일에 대해 쓰는 건 불편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방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을 잠근다고 불편한 생각이나 싫은 감정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마음속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던 감정을 차분하게 글로 풀어내다 보면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경우도 있고, 별것이긴 하나 그럴싸한 해결책이 따라오는 경우도 있다. 글을 쓰느라 바빠진 머리가 불편한 생각을 잠시 뒷전으로 여기게 되는 건 덤으로 얻는 글쓰기의 효과다.

<별일 없어도 내일은 기분이 좋을 것 같아>는 행복에 대해 쓴 에세이다. 제목만 보면 행복에 겨워 쓴 책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해주는 글을 찾아 읽듯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 잊힐 무렵에 주로 행복에 대한 글을 썼다.

힘들게 보낸 하루를 좋은 기분으로 마무리하고 싶어 일과 중 감사했던 일들을 헤집어 기록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어려울 때는 누군가에게 고자질하듯 있는 상황을 그대로 쓰기도 한다. 그럴 때 글은 힘든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의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해도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듯 글로 풀어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진다.

글쓰는 직업을 갖는 게 꿈이었지만 어쩌다 글쓰기와 무관한 일을 하게 되었다. 가끔 수기 공모전 같은 데다 짧은 글을 써서 보내는 것 외에는 쓸 일이 없었다. 그러다 꾸준히 글을 써보자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다. 첫째를 낳은 일이다.

출산 후 1년 3개월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단둘이 보냈다.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아이가 아파서 보채는 날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었고, 아무 일 없는 날에도 고립감과 조바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백일쯤 되었을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처럼 어떤 일이 있었고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쓰는 정도였다. 돌봐주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외롭고 서러운 애엄마의 마음을 스스로 살피는 방법으로 글을 썼다.

분명 힘들다 말하려고 시작한 글인데 쓰다 보면 행복하다는 결론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힘들지만 보람 있고, 힘들지만 고맙고, 힘들지만 아이가 너무 예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식이었다.

감정은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것 같지만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있는 걸 하나씩 발견해가는 건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부정적인 감정을 한 겹씩 벗겨내다 보면 그 안에 숨은 진짜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은 숨은 감정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은 복잡하고 어려워도 궁극적으로는 행복하다는 걸, 혹은 행복을 향해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네 생각'이라는 글을 쓴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 민원인은 또 전화를 걸어왔다. 늘 듣던 말이 반복, 또 반복되었지만 전보다는 내 목소리가 조금 더 상냥해졌다. 내 글의 소재를 제공해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전화가 한 번만 더 오면 꼼꼼히 메모해두었다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도 한편 써봐야겠다 벼르고 있었다. 내 나름의 작은 복수를 계획한 거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전화를 끝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어쨌든 글이 어려운 상황에 빠진 날 돕는 건 분명하다. 때로는 숨 쉴 구멍이 되어, 때로는 마음을 듣고 호응해주는 친구가 되어, 때로는 맞서 싸울 무기가 되어.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no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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