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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영남농악을 대표하는 진주삼천포농악의 계승 발전과 보급, 예인 양성에 한평생을 바쳤던 인간문화재 박염 선생(1941년생)이 지난 2월 16일 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장례는 지역문화예술인과 가족, 농악 보존회원들의 애도 속에 치러졌으며, 2월 19일 사천의 가족 묘원에 안장됐다. 예술인이자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1호 '진주삼천포농악' 예능보유자(설장구, 1991년 5월 지정) 박염 선생의 삶을 돌아본다.
 
고(故) 박염 선생
 고(故) 박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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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염 선생은 일제 강점기였던 1941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났다. 일본 패망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박염 선생의 부모님과 5남매가 피난길에 올랐으며, 해방이 되자 부모님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시(현 사천시) 남양동으로 귀향했다.

박염 선생은 1955년 초 지신밟기를 준비하던 삼천포 송포농악단에 입문하면서 68년간의 예술인이자 교육자의 삶에 첫발을 디뎠다. 젊은 시절 박염 선생은 유랑 예인 집단과 함께 경남을 주 무대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악 기예를 선보였고, 여러 명인들이 알아주는 실력을 갖췄다. 1977년 1월 31일 진주삼천포농악 이수자로 지정됐다. 산청 생비량 출신의 명인 '송철수' 선생과도 10년 넘게 교우했다.

박염 선생의 예술인으로서 삶은 그 당시 대부분의 전통예술인이 그러하듯 순탄치는 않았다. 생계를 위해 지역순회 약장사와 함께 공연활동 등을 하기도 했으며, 한국민속예술촌에서 월급을 받으며 전속으로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80년대부터 전국의 많은 대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전국적으로 농악12차(현 진주삼천포농악)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4년 한국민속예술촌 활동 당시 모습. 박염 선생(사진 왼쪽에서 첫 번째)이 장구를 든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4년 한국민속예술촌 활동 당시 모습. 박염 선생(사진 왼쪽에서 첫 번째)이 장구를 든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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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문백윤 선생 사망 이후 뿔뿔이 흩어진 예인들을 규합해 삼천포농악단을 다시 결성하고, 12차 농악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는 지역에서도 많은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어머니풍물단이나 마을단위의 농악대를 교육하는 등 진주삼천포농악의 활성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90년에는 제1회 삼천포시민문화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진주삼천포농악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박염 선생은 1998년 제1회 한국농악명인전, 2002년 영남 명인전, 2003년 국립국악원 명인명무전 등에 명인으로 출연해 설장구 기예를 선보였다. 또한 그는 1998년 브레덴 국제민속예술제, 2001년 한일 월드컵 홍보사절단 영국 공연, 2004년 문화재청 주관 남북문화교류전 금강산 공연 등 다수의 해외공연으로 농악의 멋과 맛을 세계에 알렸다.
 
2002년 영남명인전에서 박염 선생이 설장구 기예를 선보이는 모습(사진=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2002년 영남명인전에서 박염 선생이 설장구 기예를 선보이는 모습(사진=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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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염 선생은 세계무대에 우리나라 농악 우수성을 알렸다. (사진=뉴스사천DB)
 박염 선생은 세계무대에 우리나라 농악 우수성을 알렸다. (사진=뉴스사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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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진주삼천포농악 사무국장은 "68년간의 예술인의 삶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셨던 선생의 모습을 기억한다"며 "많은 이가 영남채상설장구의 명인으로, 때로는 예술과 삶의 철학을 함께 나눈 스승으로 박염선생의 노력과 헌신을 기억하고 있다. 박염선생의 활동은 진주삼천포농악이 현재 전국 제일의 무형문화재 단체로 활동을 할 수 있는 근간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진주삼천포농악은 평택농악, 이리농악, 강릉농악, 임실필봉농악과 함께 우리나라 5대 농악에 속한다. 1966년 농악 12차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985년 진주농악12차, 1986년 진주농악, 1993년 지금의 진주삼천포농악으로 지정명칭이 변해왔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농악에 선정됐을 당시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박염 선생이 농악을 지도하는 모습(사진=문화재청)
 박염 선생이 농악을 지도하는 모습(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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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삼천포농악 대학생 전수교육 모습. 
 진주삼천포농악 대학생 전수교육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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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삼천포농악은 조선시대 전문예인집단인 이우문행중의 솟대쟁이패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적 가치가가 높으며, 버꾸놀이, 자반뒤집기 등 개인기가 뛰어나다. 판굿에서 채상 또는 부포놀이가 돋보이며 군사놀이의 진법과 소고수들의 무예적 몸짓이 특징이다.

진주삼천포농악은 황일백, 문백윤 선생을 거쳐 김선옥 선생과 박염 선생의 노력으로 연희 중심의 진주농악과 마을두레농악 중심이었던 삼천포농악의 판제가 한데 합쳐져, 현재 12차 농악의 맥을 잇고 있다.

인간문화재 박염 선생이 걸어온 길

- 1941년 일본 미야기현 출생
- 1945년 삼천포시 남양동 귀향
- 1955년 농악 입문
- 1977년 1월 31일 이수자 선정
- 1981년 삼천포농악단 재결성
- 1990년 제1회 삼천포시민문화상 수상
- 1991년 진주삼천포농악 예능보유자(설장구) 지정
- 1989년 삼천포시장 감사장 표창
- 1998년 제1회 한국농악명인전 출연
- 1998년 브레덴 국제민속예술제 등 해외무대 다수 출연
- 1999년 사천시민의날 기념 시민표창 시상

- 2001년 한일 월드컵 홍보 사절단으로 영국 공연
- 2002년 부산남산놀이마당 주최 '영남의 명인전' 등 출연
- 2003년 국립민속국악원 주최 명인명무전 '예인' 출연
- 2004년 문화재청 주관 남북문화교류전 금강산 공연
- 2010년 예인활동 55주년 기념 공연

- 2022년 2월 26일 별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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