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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답니다. 읍으로 나오시랍니다." 1945년 8월 16일 식전에 충북 영동군 영동읍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소년이 양강면 양정리 장철에게 와서 한 말이다.

이 말에 장철은 신발도 신지 않고 버선발로 집을 뛰쳐나갔다. "만세! 조선독립 만세!" 그는 미친 사람처럼 마을을 한바퀴 돌며 목이 쉬어라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집집마다 다니며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네. 왜놈들이 물러간디야"라고 외쳤고 심지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들을 깨워 해방 소식을 전했다.

장준 환영대회가 열리다
 
장준 생가 터(충북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
 장준 생가 터(충북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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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서둘러라." "네. 아버님." 장철의 채근에 우진·영진·도진·기진 형제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셋째아들 장도진은 네 살짜리 딸 설자를 목마 태웠다. 그들이 사는 양정리에서 영동 역전까지는 10리(4km) 길이었는데, 가는 길은 흰옷을 입은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영동 마차다리(현재 영동대교)를 지나 영동시장 즈음부터는 제자리 걸음을 해야 했다. 영동역에는 나무로 연단이 설치됐다. "지금부터 독립운동가 장준 선생 환영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사회자 말에 참석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잠시 후 연단에 장준(1894년생)이 나타나자 "장준! 장준!"하는 연호가 터졌다. "동포 여러분! 그동안 왜놈들의 착취와 탄압에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육촌 형님인 장준의 연설을 듣는 장철(1895년생)은 울컥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장준과 함께한 고난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장준과 장철은 '영동소작인상조회', '7월회'에 이어 '영동노농동맹회', '영동청년연맹' 활동을 같이 했다. 특히 영동청년연맹 활동과 관련해 1928년 영동군 18명의 활동가가 구속됐는데, 장철도 장준과 함께 1년 감옥살이를 했다.

장준은 이외에도 영동청년동맹(1929년), 영동소비조합(1930년), 영동적우동맹(1931년)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했다. 특히 영동소비조합은 출범한 지 1년 만에 영동면(현 영동읍)에서만 조합원을 3천 명이나 모았다. 생활용품을 공동구입해 중간이윤 없이 조합원들에게 값싸게 공급해,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던 소비조합운동은 농민과 주민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다.

장준은 일제강점기 충북 영동군의 농민운동과 소비조합운동,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이외에도 1921년 종중 땅을 담보로 양강면 양정리에 구세군 예배당을 유치하여 구세군 선교에 산파 역할을 했다. 장준은 그곳에서 노동야학을 열었다. 또 그는 1926년 12월 결성된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충남북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장준은 일제강점기에 20여 년 동안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몸 바친 애국자이자 혁명가였다. 해방 전 공주형무소에 수감돼있던 장준은 1945년 8월 17일 출옥했다.

장준은 말 그대로 영동군민에게는 전설 속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니 영동역에서 '독립운동가 장준 환영대회'를 치른 것은 당연했다. 8월 17일 행사에 장설자(집 나이 4세)는 아버지 장도진의 목마를 타고 할아버지 장철과 함께 참가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감옥살이

1945년 12월 8일부터 3일간에 걸쳐 남북조선의 332만여 명 조합원과 239개 조합을 대표하는 545명 대의원이 참석한 전농 결성대회가 서울 경운동 천도교회관에서 열렸다. 전농은 결성대회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와 조선인 지주에 대한 소작료 3·7제를 결정했다. 이 역사적인 대회에 장준과 장철이 각각 충북과 영동군 대표로 참석했다. 오중순(영동읍 심원리), 이종(영동읍 봉현리), 김태수(영동읍 매천리)도 함께 했다.  

장준과 장철을 위시로 한 이들은 해방 후 통일국가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민위원회·전농·조선공산당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장철의 사촌 형인 장곤(1909년생)과 장인국, 장준의 아들 장세진, 장철의 아들 장도진·장기진도 동참했다.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반대해 대구시민들이 일으킨 식량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충북 영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와중에 10월 3일 영동읍에서 좌·우익이 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장준 등 18명이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장철과 그의 아들 장기진(1923년생)도 '소요 및 건조물 손괴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이들과 그의 자식들이 해방 후 조국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비운을 겪었다.

시간이 흘러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개최되기 하루 전인 1948년 5월 9일 오후 9시경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 속칭 '속세봉'에서는 봉홧불이 올랐다. 장도진이 주동이 돼 5·10선거(초대 국회의원 선거) 반대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5·10선거는 남북의 영원 분열이니 결사 반대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남로당과 좌익 진영의 반대에도 제주도 2개 지역구를 제외한 198명의 국회의원이 전국에서 선출됐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에 북조선은 남로당으로 하여금 인민대표자대회 소집을 위한 지하선거를 치르도록 했다. 북조선은 이 선거에 총유권자 8,681,746명 가운데 그 77.52%에 달하는 6,732,407명이 선거에 참여하였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대단히 과장된 수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북조선은 위 선거를 토대로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1,080명의 남측 '인민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360명의 남측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설립했다. 남조선과 북조선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된 정부가 수립됐다.

장준과 장철은 당시 해주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이후 장준은 북에 남았고 장철은 남하했다. 양단된 민족의 운명처럼 육촌 형제인 이들의 운명도 갈렸다.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넘겨

장철의 아들인 장도진의 딸 장설자는 양강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49년에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돈암동 문칸방에서 엄마 박봉아를 만났다. 박봉아의 남편 장도진은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에서 검거돼 김천형무소를 경유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장도진의 옥바라지를 위해 박봉아는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장설자는 엄마의 손을 잡고 그해 여름 서대문형무소에서 아버지를 두 번 면회했다.

이후 장설자는 양강면 양정리 본가로, 박봉아는 친정인 경북 금릉군 봉산면 봉계리로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장도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육촌누나인 장경진을 찾아가 "영동으로 내려갑니다"라고 했지만, 이후 영원히 소식이 끊겼다. 영동으로 남하하다 군·경에 검거돼 학살됐을 수도 있고, 인공 시절 서울에서 활동하다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부터 장도진의 부인 박봉아가 있던 경북 금릉군 봉산면 봉계리에서는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박봉아의 친정아버지도 봉산지서에 연행됐지만 곧 풀려났다. 그는 봉산면장을 역임하고 술도가도 운영한 지역 유지였다. 대신 박봉아가 검거됐다. 당시 그녀에겐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젖먹이(장준혁)가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 아기를 넘기고 자기 손가락에 있던 결혼반지도 빼주었다. 친정엄마는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박봉아는 7월 15일경 봉산면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CIC 트럭에 실려 금릉군 구성면 상거리 지리대 지리계곡으로 갔고 그곳에서 총살 당했다. 남편 장도진이 이미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았는데, 단순히 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이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과부와 아이들만 남은 마을
 
증언자 장설자(장도진의 딸)
 증언자 장설자(장도진의 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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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는 마을이 풍비박산났다. 장도진의 큰형 장우진(1915년생)은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영동읍 어서실에서 학살됐다. 둘째 형 장영진(1917년생)은 전쟁 통에 행방불명되었다. 장준과 그의 아들 장세진은 전쟁 전에 월북했다. 국민보도연맹 양강면 책임자였던 장곤은 시기가 불분명하지만 월북했다. 장인국은 전쟁 전에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 직후 학살되었다.

1950년 3월 14일 발생한 영동초등학교 방화사건 여파도 참혹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양강면 양정리 이강문, 장우섭, 장인천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 발발 직후 청원군 일대에서 학살됐고, 이범철은 영동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이외에도 양정리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부역혐의사건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됐다.

당시 양강면 양정리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 수십 명에 달했다. 장세진(장준의 아들), 장철의 아들 삼형제인 장우진·영진·도진, 장곤, 장인국 집만 따져보더라도 5명의 과부와 20명의 자녀들이 남편과 아버지 없이 살게 되었다. 그중 장설자 3남매는 아버지 장도진과 엄마 박봉아를 모두 잃어 천애고아가 되었다. 특히 젖먹이 장준혁은 영양실조로 1951년에 사망했다. 장철의 동생 장희는 아기 장준혁의 시신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다.

1970년도에 영동경찰서는 '관찰보호자카드'를 작성해 해당 주민들을 감시했다. 카드 대상자 중 양강면 양정리 정원자(1892년생)가 있었다. 그녀는 장도진의 어머니였는데, 장도진이 남로당원으로 활약하다가 월북해 행방불명됐다며 경찰은 정원자를 감시했다. 만약 장도진이 간첩으로 남파되면 어머니와 접선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도진이 월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박봉아는 그의 아내라는 이유로 한국전쟁 초기 처형됐고, 정원자는 어머니라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장설자 역시 결혼 전에 경찰이 찾아와 아버지 장도진의 행방을 물었다. 정작 장설자가 경찰과 국가에 묻고 싶었던 것을 말이다.

태그:#장준, #독립운동가, #영동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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