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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송지면엔 땅끝마을이 있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리고 이곳과 진도 사이에는 갈매기섬(갈명도)이라는 무인도가 있다. 송지면 주민들의 끔찍한 죽음이 있었던 곳이다. 

갈매기섬을 찾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무인도다 보니 배를 따로 빌려야 했고, 무엇보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이미 몇 달 전 해남을 찾았을 때, 출발 당일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어 예약한 배가 뜰 수 없었다. 그리고 약 2개월 후인 2월 초, 다시 찾았지만 출발 전날 날씨 때문에 갈 수 없다는 선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도 허탕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선장님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10시 이후부터 바람이 분다는 예보가 있으니 이른 아침엔 운항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물때를 감안하면 갈매기섬을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은 오전 8시에서 10시 정도까지 2시간 남짓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갈매기섬을 가려고 했던 이유는 여기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이 매우 끔찍했던 데다가 이곳의 진실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매우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무인도였기에 생존자가 운 좋게 구조되지 못했다면 진실이 영영 가려질 뻔했다. 아마 가해자들은 그걸 바라고 무인도를 학살 장소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출발 당일(8일), 어란진항이 아닌 송호항에서 3톤짜리 낚싯배에 올라탔다. 바다는 파도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렇게 30~40분 정도를 달려가니 드디어 갈매기섬이 눈에 들어왔다.
 
  뱃길로 약 3~40분을 달려 도착했다.
▲ 갈매기섬  뱃길로 약 3~40분을 달려 도착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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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마을을 비롯한 송지면 주민들은 이곳으로 끌려 왔다가 배에 태워졌다.
▲ 어란진항  땅끝마을을 비롯한 송지면 주민들은 이곳으로 끌려 왔다가 배에 태워졌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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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섬으로 떠났던 그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예비검속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서 가두는 것이었다.

해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밀려오는 인민군으로 다급한 와중에도 해남경찰은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지역 내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에 나섰다. 보도연맹원들은 해남경찰서와 송지 지서 등에 구금되고, 며칠 뒤 해창항과 어란진항으로 끌려갔다.

1950년 7월 16일, 경찰들은 어란진항 수협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큼지막한 돌과 함께 배에 태웠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의 몸엔 돌을 묶었다. 누구도 목적지를 몰랐지만, 이미 이 뱃길이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동안 가던 배가 중간에 멈추고 인솔자가 공포탄을 쐈다. 그러자 경찰들은 2명씩 짝을 지어 사람들을 바다에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엄청난 소요와 저항이 일어났다. 하지만 경찰들은 총을 쏘며 저항을 진압했다. 그렇게 배에 탔던 민간인들 중 약 100여 명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배는 다시 출발했고, 잠시 후 갈매기섬에 도착했다. 경찰들은 사람들을 끌어내려 횡으로 세운 다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경찰들은 갈매기섬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 학살했다.
▲ 다른 쪽에서 바라본 갈매기섬  경찰들은 갈매기섬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 학살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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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사살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한바탕 총살이 끝난 다음 경찰들은 시체들을 그대로 놔둔 채 배를 타고 갈매기섬을 떠났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뱃머리를 돌려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체들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확인 사살이면서, 학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 무리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확인된 것은 총 4명인데 훗날 이들의 증언으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생존자 중 박상배씨는 어란진항이 아니라 해창항에서 끌려왔다. 경찰들의 무자비한 총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났던 그는 경찰이 떠난 후 피가 흐르는 시체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경찰들의 배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옷을 벗었다. 당시 자신의 옷은 흰색이어서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다른 시신의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근처 동백나무 숲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거기에서 그는 경찰들이 시신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된다.

경찰들이 돌아가고 박상배씨는 살아남았지만 그곳은 무인도였다. 그는 시신의 고무신을 벗겨서 빗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섬 주변의 굴 등을 캐서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나마 한여름이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약 보름 정도가 지난 후 인근 구자도의 낚싯배에 발견돼 구조됐다.
 
  박성배씨는 저 숲 어딘가로 몸을 숨겨서 겨우 살아 남았다.
▲ 갈매기섬의 동백나무 숲  박성배씨는 저 숲 어딘가로 몸을 숨겨서 겨우 살아 남았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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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오랜 기간 가라앉았던 진실

당시 구금돼 있는 사람들의 식사는 가족들이 책임졌다. 그래서 매일 식사를 가져다 날랐는데, 어느 날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없어지자 매우 놀랐다. 이후 그들이 갈매기섬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은 바로 배를 띄우려 했다. 하지만 경찰들은 이들을 방해했고, 갈매기섬으로 가려는 일부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유족들은 해남에서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모두 철수한 이후인 8월이 돼서야 갈매기섬으로 갈 수 있었다. 섬에 도착한 유족들은 그 참혹한 모습에 말을 잃었다. 더운 날씨의 시신의 배는 부풀어 올랐고 파리떼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런데 시신을 수습하던 유족들에게 뭔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것은 생존자였는데 마치 귀신같은 몰골이라 유족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일부 생존자들은 유족들에게 발견돼 겨우 돌아왔다.

생존자들은 이후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부역하다가 수복 이후 다시 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박상성배씨는 자신이 갈매기섬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오랜 기간 입을 닫았다.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기 싫은 것도 있었고 감히 경찰이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말을 했다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 겁이 났었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입을 닫았던 그는 유족들의 끈질긴 설득과 하소연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유족들에게 본인의 경험을 조금씩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그날의 끔찍한 일들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4년 박상배씨와 유족들은 갈매기섬으로 가서 다시 일부 유해를 수습한다.

하지만 당시 군부 정권은 해남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조금씩 드러나던 진실은 더 이상 밝혀지지 못한 채 다시 오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일부 유해를 수습해 현장 인근에 매장하게 된다.

이후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에 의뢰해 갈매기섬의 유해 발굴에 나선다. 사건이 있은 지 수십 년에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유해는 매장되지 않은 채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카빈과 M1 소총의 탄피와 탄두가 나왔다. 또한 '자연발화로 볼 수 없는 고열로 불탄 뼈조각들이 분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섬을 떠났던 경찰들이 다시 돌아와 시신에 불을 질렀다는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는 총 19구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총 74명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고, 미확인된 피해자까지 합치면 약 100여 명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갈매기섬으로 가던 중 수장된 인원과 시신이 섬의 기후에 오랜 시간 방치됐던 점 등을 감안하면 총 사망자는 200~300여 명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길의 끝, 삶의 끝, 새로운 길의 시작  
 
   저 멀리 보이는 육지가 진도다.  갈매기섬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난다.
▲ 세월호 사고 해역 인근  저 멀리 보이는 육지가 진도다. 갈매기섬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난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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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섬으로 가는 뱃길 중간에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해역 인근을 지나갔다.

땅끝마을은 길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기 위해 이곳을 찾곤 한다. 하지만 과거 어떤 이들에게는 단순한 길의 끝이 아니라 삶의 끝을 마주해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과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지금까지 왔던 길을 그냥 계속 가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의 아픈 현대사는 아직도 그 어두운 고통의 길 속에 있다. 하루빨리 모든 진실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고 그 위에서 우리 공동체가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길 바란다. 
 
  길의 끝이자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 땅끝 표식  길의 끝이자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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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박만순, <박만순의 기억전쟁>, 고두미
박선주 외(2009),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발굴 유해의 인류학적 연구 - 2008년 출토 유해를 중심으로 ->, 충북문화재연구, 2, 103-138
박찬승(2012), <한국전쟁 전후 해남군에서의 민간인 학살>, 구술사연구, 3:1, 7- 45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국민보도연맹 사건(3) -함평·해남·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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