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연로하신 부모님을 걱정하는 50대들이 주변에 참 많다. 한 지인은, 대퇴부 골절 수술 후 재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80대 어머니가 걱정이다. 90대 친척 어르신은 청력을 잃은 데다 거동이 힘드셔서 아들이 재가 요양보호사 서비스를 신청했다. 치매기가 나타난 80대 부모님을 돌보러 50대 아들이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조만간 국민의 1/5인 천만 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되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만큼 장수하는 노인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노인들이 많아진다는 뜻 이리라. 당연히 이들을 돌보기 위한 각종 지원책과 요양시설의 이용, 그리고 가정 내 돌봄을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이 중요해진다. 사회적으로 이런 여러 선택들이 있지만, 노인을 부양하는 각 가정의 모습은 처한 상황에 따라 모두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50대인 나와 70대 부모 그리고 90대의 할머니
 
장수하는 노인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많아지는 초고령 사회.
 장수하는 노인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많아지는 초고령 사회.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70대 중반의 부모님은 90대 중반의 할머니를 2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돌보고 계시다. 그 긴 시간 할머니의 노후를 책임지고 있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아무리 허물없는 부모-자녀 관계일지라도 오랜 시간 부모를 돌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성심껏 돌보지만, 명쾌한 해결책이 딱히 없는 잠재된 어려움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부모님 댁에서 1시간 거리의 시골집에서 홀로 지내오셨다. 따로 지내셨다고는 하지만, 부모님이 늘 드나들며 할머니의 밭일을, 살림을, 크고 작은 집 안팎의 온갖 일을 살펴드린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그 또래 분들이 대개 그렇듯 아들 내외에게 자신의 노후를 의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무엇이든 당당히 요구하셨는데, 할머니의 그런 태도가 부모님을 다분히 힘들게 했던 것 같다. 

할머니를 돌보는 게 주요 일과가 되다시피 한 부모님은 50, 60대 은퇴 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다가도 할머니가 걸려 마음껏 일정을 잡지 못했고, 간혹 동행한 여행에서는 기력이 약한 할머니를 내내 부축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게다가 퇴직 후 고정된 액수의 연금으로 할머니의 생활비와 점점 증가하는 의료비까지 전적으로 부담하시느라 늘 신경 쓰고 긴축하며 사셨다.

그러던 중 부모님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다. 두 분 모두 관리해야 할 지병이 생겼고, 허리와 무릎과 눈이 안 좋아지셨다. 하필 따로 사시던 할머니도 연세가 90을 넘기자 시력과 무릎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스스로 거동이 어려워졌고, 병원 치료차 부모님 댁에 머무는 날들이 점점 늘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집에서 돌보게 된 부모님의 일상은 급속도로 가혹해졌다. 

특히, 엄마는 타박이 끊이지 않는 할머니의 간병과 세 끼니에 꼼짝없이 묶여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하소연하셨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고성이 자주 오갔고, 누구도 평안치 못했다. 할머니를 집에 모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기에 할머니의 요양병원행이 언급되었지만, 할머니는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격앙된 갈등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거친 후에야 할머니는 요양병원행을 결정하셨다.

부모님과 할머니를 오랜 시간 지켜보며, 늙는다는 일이 참 서글퍼진다. 남은 인생을 요양병원의 좁은 침대에서 보내야 하는 할머니도 안쓰럽다. 동시에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기진한 일임을 깨닫는다. 제한된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문제, 다른 성격과 상반된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녀의 건강악화 같은 문제들이 어느 틈엔가 나타나 가족 간에 틈을 넓힐 대로 넓히고, 일상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경험을 기반으로 다가오는 부모님의 노후와 더 멀리는 나의 노후까지 생각해 본다. 과연 어떻게 해야 원만하고 편안한 삶의 막바지를 보낼 수 있을지 자꾸 궁리해 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경제력과 심리적으로 그리고 일상생활까지 전적으로 의존하는 노후는 부모나 자녀 모두에게 불만족스럽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은 이미 모든 면에서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적 일상을 단단하게 꾸려가고 있다. 아마도 당신들이 지던 같은 짐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배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의 노후도 이런 자립적 일상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할 때가 기어코 오고야 만다면? 글쎄, 요양시설에 가는 것만이 꼭 유일한 방법일지 고민이 된다.

늙은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방해받지 않길
 
  영화 <마지막 레슨> 중 주요장면
  영화 <마지막 레슨> 중 주요장면
ⓒ (주) 수키픽쳐스

관련사진보기

 
마침 이 궁리에 도움이 되는 영화를 소개받았다. 2015년 파스칼 포자두 감독의 <마지막 레슨>이라는 프랑스 영화다. 스스로 일상을 꾸려가던 92세의 노모, 마디는 어느 날 운전이 두렵게 되고, 잠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소변을 보며 절망에 빠진다. 변기에서 일어나다가 허리를 삐끗하여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딸과 아들은 쓰러진 노모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모시고는 이제 요양원에 가시라, 자기 집으로 모신다 수선을 떤다.

하지만, 마디는 의료시설에서 기저귀를 차고 몸의 여기저기에 튜브를 단 채 환자로 연명하는 삶을 거부한다. 마지막 하루를 살아도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존엄을 지키다 자발적 죽음을 맞겠다고 한다. 노모의 이런 뜻을 헤아리려고 애쓰는 딸과 달리 아들은 격정적으로 화를 내며 소리친다. "늙으면 다 그런 거라고요. 다시 아이가 되는 거예요. 그 따위 자존심은 버리고 그냥 받아들여요." 

아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노모의 결심에 적극 공감하고 동의한다.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마지막을 맞을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사실 현실에서도 이미 가능한 방법이다. 스위스나 호주(일부 주에 한해),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일부 주에 한해) 등의 나라는 이미 '자발적 조력사' 제도가 있다. 의사의 판정 아래 약물이나 주사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는 자살과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 합법적이고 온 가족의 사전 동의와 입회 아래 공개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하지만 좀 다른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라는 게 있다. 본인이 회복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에 걸려 의식을 잃었을 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이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진전으로 보여 반갑지만, '자발적 조력사' 제도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한편으론, 과학기술과 의학발달에 힘입어 휴머노이드 같은 로봇에게 노년을 의지하는 등 조만간 좀 더 다양한 노년의 모습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노인으로 살고 싶다. 늙은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숨 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명이 길어진 시대가 누구에게나 짐이 아닌 축복이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