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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렛 모양을 보니 누군지 알겠네요. 하트 모양이잖아요."

의사가 컴퓨터에서 내 위 사진을 보더니 한 마디를 했다. 일 년에 한 번 외래진료로 만나는 나를 의사가 못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위 사진을 보고 나서 의사가 한 말은 10년차 환자인 내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어, 정말이요. 하트 모양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바짝 내밀어 컴퓨터에 보이는 내 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살짝 누운 하트 모양의 염증 부분이 내 식도쯤 될 것이다.

"하트모양은 한 명뿐이라서 기억하는 거예요."

의사 말에 나는 "하트 모양이래" 하며 보호자인 남편에게 속삭였다.

위염과 식도염으로 오래 고생 했으면서도 하트 모양이라는 말에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듯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병변의 모양으로 악성, 양성을 판단하기도 하는 내시경 검사에서 무슨 좋은 조짐이라도 되는 듯 긍정적인 마음이 솟구쳤다.

"그래, 내가 인상은 좀 차갑긴 해도 속은 이렇게 따뜻하다니까. 식도에 하트를 달고 살잖아." 터무니없는 근거로 나를 칭찬하며 자신 있게 위 내시경 검사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선생님, 지난번 내시경 때 고생을 많이 해서요. 이번에는 수면 내시경으로 했으면 해요."

내시경 선수에서 은퇴하다
 
위 내시경 후 이곳에서 꿀잠을 잤다.
▲ 수면 위 내시경 회복실  위 내시경 후 이곳에서 꿀잠을 잤다.
ⓒ 오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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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도염 환자다. 그것도 바렛(위산의 오랜 역류로 식도 세포가 일부 위 세포로 변형된 식도)이라고 악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식도염이라 해서 대학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아 왔다.

식도염 환자는 대체로 위염 환자이기도 하다. 요즘 식도염은 젊은 층에서도 많이 발병하지만 나처럼 위염이 오래 되서 식도염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30대부터 위염을 앓아 왔고 덕분에 꾸준히 내시경 검사를 해 와서 자칭 위내시경에서는 선수 급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간 내시경을 할 때는 기도문 하나를 암기하며 내시경 호수를 꿀꺽꿀꺽 삼켜야 하는 거부감을 견디어 왔다. 수면 내시경을 한 번 해보긴 했는데 하루 종일 수면 상태인 것 같은 몽롱함이 꺼림칙했다.

이미 여러 번 했던 수술과정에서 쓰인 마취약물도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하니 잠깐 마취를 하는 수면내시경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일반 내시경을 오래 하다 보니 "검사 잘 받는다"는 칭찬을 들을 만큼 나는 내시경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해 검사 직후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의 통증을 겪은 후 내시경 선수에서 은퇴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일반 내시경은 마우스피스를 무는 것에서 시작한다면 수면내시경은 마우스피스를 무는 것에서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일어난다. 끝이라 함은 기억이 끓어지는 것이다. 내시경 전에 컴퓨터에 앉아 진료기록을 보던 의사의 등이 마지막 기억이 된다.

수면 내시경에서는 마우스피스를 통해 서서히 들어오는 내시경 호스를 손을 내저어 막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숨을 크게 쉬며 '그래, 견디어 보자'라는 결심의 기억도 없다. 내시경 호스가 위를 탐색할 때 느껴지는 무력감도 모두 약물의 도움으로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의 소음으로 눈이 떠지면 30분의 시간이 사라진 후다. 의사의 진단은 이미 보호자인 남편에게 전해진 뒤다. 눈을 뜬 내가 몇 분 만에 깨어났냐고 물었다는데 이 역시 기억에 없다. 물어보기 좋아하는 성격은 무의식에서도 작용했나 보다.

"환자의 식도염은 악성이 될 가능성이 없으니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 일은 없어요."

남편은 의사의 진단 결과를 전해 주었다.

'하트 모양의 바렛, 비련의 여주인공.' 이번 진료 결과의 용어들은 산뜻하고 새롭다. 담당의사가 요즘 문학책을 많이 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최근에 어설픈 책이나마 한 권 낸 것을 눈치라도 채고 이런 문어적인 표현을 한 것일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도 문학적 표현이 식도염이라는 병명을 순화시켜 준 것 같아 나쁘지 않다.

내시경을 마치고 받는 의사진단은 나에겐 통지표다. 다음 정기검사까지 안심하고 살다 오라는 위로의 선물이기도 하다. 남편을 통해 전해들은 진료 결과에 나는 1년이란 시간을 다시 벌었다.

이번 통지표를 전달 해준 남편은 선물세트도 함께 줬다. 흰 죽이다. 일반 내시경 후에는 밥을 하던 아내가 계속 수면상태에서 침대를 지키자 손수 쌀을 불리고 빻아 처방대로 흰 죽을 쑤었다.

결혼생활 중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죽을 잘 쑤니 손주 야채죽도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고 칭찬을 했다. 적당한 환자로 옆에 있으면 부부로 늙어가는 게 든든하기도 하다. 이제는 병명 몇 개쯤은 친구 삼은 나이가 됐다. 부드러운 죽을 먹으며 아픈 곳은 달라도 서로의 보호자가 되기에는 아직은 끄떡없다 싶었다. 남편의 흰 죽은 내시경 통지표에 첨가된 또 하나의 선물이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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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일상안에 숨어있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짓습니다. 글쓰기는 일상을 대하는 나의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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