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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태극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 고종이 외교 고문이었던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이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 고종이 외교 고문이었던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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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국기(國旗)는 그 나라의 뿌리와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국민의 정신과 주권을 대표하는 표상이다. 따라서 국기에는 국가의 권위와 존엄이 담겨 있고 이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밝음과 평화, 순수를 상징하는 흰색 바탕. 음과 양의 기운이 담긴 파랑과 빨강의 태극 문양. 사방 모서리에 새겨진 하늘·땅·물·불·을 의미하는 건(乾)곤(坤)감(坎)리(離)의 검은색 4괘.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太極旗)'에는 우주 만물의 근원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고 순수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 국민의 염원이 담겨 있다.

13세기 초 맨 처음 국기를 사용했던 덴마크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국기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도 국기를 사용한 지 약 140년 정도가 되었다. 

태극기를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존재한다. 이 중에서도 1882년 9월 고종의 수신사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이른바 '박영효 창안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견해로 박영효보다 4개월 앞선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인된 조선과 미국의 통상 수호조약 체결 시 양국이 국기를 서로 교환했다는 게 있다. 조약이 끝난 후 조선의 국기는 조·미 수호조약의 총괄 책임자 슈펠트 제독에 의해 미국으로 전달됐다.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인된 조·미 통상 수호조약 체결 시 사용했던 태극기. 미 해군이 발행한 <해양국가의 깃발(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서적에 ‘COREA Ensign’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등록되어 있다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인된 조·미 통상 수호조약 체결 시 사용했던 태극기. 미 해군이 발행한 <해양국가의 깃발(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서적에 ‘COREA Ensign’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등록되어 있다
ⓒ 국립 해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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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극기는 1882년 7월 미 해군이 발행한 <해양국가의 깃발(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서적에 'COREA Ensign'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등록되어 있다. 이 태극기를 고안한 사람은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부친이며 통역관이었던 오경석과 역학에 능했던 김경수라고 전해 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

19세기 말 소용돌이치는 국제관계 속에서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고종 황제는 1883년 3월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전국에 선포한다. 이후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가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던 일제 강점기 동안 태극기 사용은 엄격히 금지된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이 되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1949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기 제작에 관한 고시에 따라 태극 문양과 4괘의 배치 등 규격을 정하게 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전까지는 상세한 규격이 정해지지 않아 그리는 사람마다 태극과 4괘의 위치를 달리하는 다양한 형태의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에서는 2021년 8월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옛 태극기 중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탁월한 3점을 국가 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데니 태극기'도 그중 하나다.
  
데니 태극기 뒷면
 데니 태극기 뒷면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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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극기는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인 '오웬 데니'가 간직했던 것이다. 1891년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데니에게 고종이 하사한 것을 그의 후손들이 1981년 우리나라에 기증한 것이다. 가로 262㎝ 세로 182.5cm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데니 태극기는 서양 국기 제작 방법을 참조해서 태극과 4괘(四卦)는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정교하게 재봉틀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잘 보이도록 했다. 깃대에 머리카락과 동물 털을 채워 넣어 태극기가 바람에 잘 버틸 수 있도록 지지력을 높였다.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는 중국 상해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 중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조선의 외교와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했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통상조약 체결 시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불리한 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력하는 등 국제관례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일장기 위에 덧 그려진 진관사 태극기. 서울 은평구 진관사 보수공사 중에 발견됐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 부분과 4괘를 먹으로 덧칠해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 현장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장기 위에 덧 그려진 진관사 태극기. 서울 은평구 진관사 보수공사 중에 발견됐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 부분과 4괘를 먹으로 덧칠해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 현장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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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위에 덧그린 '진관사 태극기'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 되던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 보수공사 중에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낡은 보자기 하나가 발견됐다. 보자기 속에서는 불탄 흔적이 있는 태극기 한 점과 독립신문류 19점이 나왔다. 신문 발행 시점이 1919년 6월부터 12월인 점을 감안할 때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태극기를 벽체에 숨긴 사람은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 스님(白初月 1878~1944)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초월 스님은 3‧1 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게 보냈다.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조국 광복을 한해 앞둔 1944년 옥중에서 순직했다.
  
진관사 태극기 뒷면
 진관사 태극기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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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 부분과 4괘를 먹으로 덧칠해 만든 것으로 항일 의지와 애국심을 극대화했다. 특히 왼쪽 모서리 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 있으며 여러 곳에 구멍이 나 있는 점으로 봤을 때 3·1 만세 운동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태극기가 감싸고 있던 신문들은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되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백초월 스님은 이를 감추기 위해 태극기에 신문 자료를 싸서 칠성각에 숨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독립 염원이 담긴 김구 서명문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독립 염원이 담긴 김구 서명문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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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염원이 담긴 '김구 서명문 태극기'

1941년 3월 16일.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은 태극기에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아 비장한 글귀를 적는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광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깃대와 괘의 사이에 김구 선생의 친필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네모난 도장이 찍혀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 김구 선생의 친필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네모난 도장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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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네모난 도장을 찍었다. 김구 주석은 이 태극기를 충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벨기에 신부 샤를 메우스(Charles Meeus)에게 건네며 미국에 가거든 우리 동포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메우스 신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태극기를 전했다.

1985년 3월 안창호 선생의 후손들은 김구 주석의 서명이 담긴 태극기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크기는 가로 62㎝ 세로 44.3㎝이며, 비단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붙이고 검은색 천으로 4괘를 덧붙여 만들었다. 깃대와 4괘 사이에 김구 주석의 강한 독립 의지가 담긴 친필 4줄 143자가 쓰여 있다.
  
비단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붙였다
 비단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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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세기하고도 3년이 되는 해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태극기가 극우 보수세력의 상징처럼 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올 3.1절에는 아파트 베란다마다 태극기 휘날리며 103년 전 조국 독립을 위해 흔들었던 태극기의 진정한 의미와 시대정신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29호(2022년 3, 4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데니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최초의 태극기, #COREA EN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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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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