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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야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만큼 깡촌에 살던 나는 8살에 서울로 이사 왔다. 내 고향은 어장이 형성되지 못한 가난한 섬마을이라 부모님은 얼마 안 되는 밭에서 감자와 땅콩을, 염분기 많은 천수답으로 벼농사를 지으셨다. 하지만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기 몇 년 전 세 자녀의 학업과 미래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서울행을 택해야 했다. 농업이 개방화되면 가격과 생산 경쟁력 모두 부족한 농촌은 금방 망하게 될 거라고 걱정이 많던 시절이었다.

나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울에 와서 몇 달간 밤마다 다시 고향 집으로 내려가자고 부모님께 졸랐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골에서 지내던 전원의 생활은 여전히 아름답고 생생한데 서울에서의 삶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독 더 복잡하고 냉담한 도시인 서울에 적응하는 것이 어린 소녀에게도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엄마가 첫 월급 털어 산 세계문학전집

하늘을 받드는 동네라서 달이 더 가깝기도 했던, 봉천동에 새 둥지를 튼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기에 이렇다 할 기술이나 지식 없이 그저 몸으로 하는 일을 택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노동을, 어머니는 미싱 공장에서 미싱 시다(미싱을 돌리는 사람을 돕는 보조를 일컫는 당시의 용어)를 했다.

미싱을 돌릴 줄 알면 시다와 달리 월급이 배나 높아 어머니는 보조하는 틈틈이 옆에서 미싱 기술을 보고 익혀 그 공장이 생긴 이래로 두 달 만에 미싱을 타는 전무후무한 직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는 삼성당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과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국내 작가들의 <동화 전집>을 구입하셨다. 삼성당과 웅진 책이 유명해서 그 당시 월급 대부분이 책값으로 나갔다고 하니, 우리 어머니도 참 대단하신 분이다.

그렇게 어머니가 비싼 돈을 주고 사 주신 <세계문학전집>은 지금도 여전히 읽고 있다. <동화전집>은 내가 중고등학생이 되던 때에 사촌동생에게 물려준 것으로 기억이 난다. 10살 무렵부터 읽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 중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었다.

지금도 주인공인 제롬의 이름을 기억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으며 속으로 제롬을 멍청한 녀석이라고 욕을 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으면서 본래적으로 타고난 페미니스트였던 나는 지나치게 책에 이입되어 울분을 토했던 것 같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헤르만 헤세, 세르반테스, 단테 등 40여 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전집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다. 나는 남자 주인공보다 여자 주인공이 부각되는 책들을 확실히 선호했던 것 같다.

물론 레마르크의 <개선문>도 참 좋아하긴 했지만 그 외에 남자 주인공이 주로 나오던 <데미안>이라든가 <수레바퀴 아래서>,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소설은 시큰둥했다. 나보다 일곱 살 연상인 오빠는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만 읽었는데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 그 책들을 읽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다.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유일한 야한 소설들이었기 때문이다(오빠 지못미).

어머니는 십대 시절 책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 종일 방이나 창고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런 어머니가 동생도 안 돌보고 시킨 집안일도 전혀 하지 않아 화가 나신 외할머니가 책을 빼앗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천사 같은 분인데도 그리 하셨다니 아마도 어머니가 어지간히 책만 읽었던 모양이다. 또 어머니가 10대 후반의 소녀 시절 기차에서 <에밀>을 읽고 있었는데 대학생 오빠가 엄마에게 다가와 <에밀>을 진짜 이해하고 읽는 거냐며 수작을 부렸다고도 했다. 나는 여전히 <에밀>을 읽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분이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는 내 스케치북에 순정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예쁜 그림들을 가끔 그려주곤 했다. 그리고 시골 촌부 아낙 답지 않게 표준말을 쓰고, 앞마당과 옆 마당에 꽃을 곱게 키우셨는데 하루는 할머니가 지나가며 '밭을 그렇게 좀 가꿔라'라고 잔소리를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정원은 동네에서 워낙 유명해 일종의 우리 마을 포토 스폿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골에서도 책을 읽히려 노력했던 분으로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이장이기도 했던 그 작디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새 농민 어린이> 같은 어린이용 월 간행물을 집에서 받아보기도 했었다.

부모님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 
 
미싱의 물리력을 경제력으로 바꾸고, 그 경제력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사신 나의 어머니.
 미싱의 물리력을 경제력으로 바꾸고, 그 경제력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사신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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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적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 비록 20대에는 공부를, 30대에는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느라 그저 독서에만 매진했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은 늘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문학은 불모지 같은 나의 생에 가끔 내려주는 소나기 같아서 황량한 영혼에 풀도 자라고 꽃도 피게 해주는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비가 오네
풀들이 자라네, 꽃이 피네
그대가 온 후 나도 그렇네

문학을 생각하며 몇 년 전 내가 지은 짤막한 시이다. 아버지는 말수도 적고, 알뜰살뜰하게 가족을 챙기는 분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연세를 고려해보면 지금도 여전히 꼰대 기질이 전혀 없는 분이다. 배움과 지식에서 얻은 통찰이 아닌, 타고난 아버지의 기질은 배움과 기회에 남녀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고, 가족에게도 타인에게도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게 오히려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하라고 늘 지지해 주셨고, 실제로 나는 대학을 두 번이나 다니고 이십 대 내내 공부만 했던 철부지 딸이었다. 내가 지나치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서였을까? 한 번은 내가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나에게 살며시 다가와 '남자 친구는 있느냐'라고 걱정스럽게 물으시던 적이 있다.

내가 웃으며 남자 친구 있다고, 그 친구와 언젠가는 결혼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그래 알았다' 하시곤 조용히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비록 말씀은 혼자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셨지만 하나뿐인 고명딸이 그래도 결혼할 생각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배움도 지식도 짧았던 부모님이었지만,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주기 위해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폭폭한 서울살이를 견뎌냈던 부모님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은 세상에서 내가 받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유산이라는 걸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결핍이 양식이었던 시절, 비록 가난하고 남루한 환경에서 일상을 살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물질적인 충만감보다 영혼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셨던 것 같다.

미싱의 물리력을 경제력으로 바꾸고, 그 경제력으로 문학전집을 사신 나의 어머니. 순전히 어머니의 근력과 지구력으로 만든 에너지는 지금 내 혈관에서 숱한 문학 작품들로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의 구별 없이 똑같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이가 들어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시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40대의 나이에 먼 타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주신 유산을 가치 있게 사용하고 다시 내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이제 내 손에 달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근면하게 글을 쓴다. 

태그:#부모님, #유산, #문학,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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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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