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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에 붉은빛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다.
 동궁과 월지에 붉은빛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다.
ⓒ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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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추측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하며 살피는 게 바로 박물관 방문이 아닐지.

동궁과 월지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 21세기를 사는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떤 걸 먹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국립경주박물관 안에는 월지관이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3년째 이어지는 상황임에도 월지관을 포함한 경주박물관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신라의 유물에 관심을 가진 역사학도들, 거기에 서라벌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살피고자 하는 학구파 연인들까지 남녀노소 불문.

이들을 반겨 맞는 월지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설명부터 확인해보자.
 
"월지관은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발견된 약 3만 점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 중에서 엄선한 1천100여 점의 문화재를 주제별로 전시해 통일신라 문화, 특히 왕실의 생활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월지는 신라 동궁 안에 있던 인공 연못.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안압지로 불렸으나 신라 사람들은 월지라고 했다. 문무왕 1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지관에는 용면문와, 금동판불상(보물 제1475호), 금동초심지가위(보물 제1844호) 등 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청아한 연꽃... 경주박물관 주위 풍경 아름다움 더해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경주를 찾는 여행자도 월지관이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KTX 기차가 멈추는 신경주역에선 버스로 25분, 경주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선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박물관이다.

만약 다가올 여름에 이곳을 찾아 버스에서 내렸다면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 동궁과 월지부터 둘러보고, 인근 연못에 하얗게 무더기로 피어있는 연꽃과 만나보기를 권한다. 동궁과 월지의 연꽃은 경주의 최고 풍광 중 하나다.

쏟아지는 햇살에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릴 수도 있지만, 연분홍과 하얀색이 하모니를 이루는 청아한 연꽃의 자태는 짜증스런 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특유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예부터 연꽃을 귀하게 취급해왔다.

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동궁과 월지 주변에 환하게 꽃을 피운 연꽃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이다.
 
"불교의 출현에 따라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알리려 꽃이 피었다고 전하며, 불교에서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神)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인도에서는 여러 신에게 연꽃을 바치며 신을 연꽃 위에 앉혔다. 불교에서도 부처상이나 승려가 연꽃 대좌에 앉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파 이전부터 연꽃이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이 달리는 모습을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표현했고, 종자가 많이 달리는 현실을 다산의 징표로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고 생각하여 사찰 경내에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동궁과 월지 지척에 피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연꽃.
 여름이면 동궁과 월지 지척에 피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연꽃.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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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의 꽃'이라 불리는 연꽃을 바라보며 잠시잠깐 감상 속에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제 월지관으로 갈 차례다.

모처럼 경주를 찾았으니 당연지사 월지관 지척의 신라역사관과 신라미술관, 옥외전시장과 어린이박물관도 돌아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토기와 기와... 신라 왕실의 문화를 만나는 시간

월지관은 개방감을 주는 2층 형태로 설계됐다. 자연스러운 동선을 따라 1층을 거쳐 2층으로 가면 아래층 중앙부가 훤히 보여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많은 수의 토기가 출토됐다. 그렇기에 월지관에선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확인할 수 있다.

실용성은 물론 수려한 조형미까지 두루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를 보고 있으면 '1200~1300여 년 전에도 저런 예쁜 도자기에 물과 술, 음식을 담아 먹었다니 신라인의 생활수준은 지금에 비해도 결코 낮지 않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면 신라의 토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어떻게 유통된 것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
 
"삼국시대 이후 토기의 생산과 공급은 왕실 및 중앙 귀족에 의해 관리됐으며 전업공인 집단에 의해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경주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은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대량 생산 체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이 지역은 토기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토기 가마의 입지는 충분한 연료 공급, 토기 제작을 위한 작업 공간, 가마 축조를 위한 적합한 지형(고도·경사도·풍향 등), 소비자와의 교통로 등 복잡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략) 경주 지역에서는 5~6세기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을 중심으로 왕실과 국가 주도의 대규모 생산 활동이 이뤄졌다. 그 후 7~8세기 이후에는 북쪽으로 화산리 가마군, 서남쪽으로는 화곡리 가마군 등 다원화된 거점을 중심으로 생산 활동이 있었고, 여기에서 생산된 토기와 기와가 왕경에 공급된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월지관엔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 1천 점 이상이 전시돼 있다.

신라 장인의 빼어난 조각기술을 실감하게 해주는 불상(佛像)에서부터 서라벌 사람들이 사용하던 숟가락과 당시 건물에 달려 있던 문고리까지. 그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기와다.

꽃무늬를 새긴 것에서부터 도깨비의 형상을 조각한 것까지 신라의 기와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채롭고도 인상적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1천 년 전 기와를 만든 신라인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월지관의 내부.
 국립경주박물관 내 월지관의 내부.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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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박물관: 기와>라는 책에선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관한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설명을 통해 월지관에 전시된 기와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추정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7세기 후반 고신라의 전통을 바탕으로 고구려 및 백제의 영향과 당나라의 자극에 힘입어 폭넓은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변화를 낳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는 우리나라의 와전사(瓦塼史·기와의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각각 특색 있게 전개돼 온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외연적인 자극에 따라 유래 없는 복합과정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월지에서 출토된 '조로2년(調露二年)'명의 보상화문전의 예로써 통일신라의 문화는 신라의 통일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토의 확장에 따르는 국력의 신장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궁전, 사찰 등 목조건축의 성황과 이에 따르는 장식성의 강조로써 지붕을 치장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된다."

신라의 '나무배'도 월지관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미려한 형상으로 밥상이나 술상 위에 오른 토기를 사용했고, 예술작품에 가까운 기와로 장식된 건물에서 삶을 영위했던 신라의 왕과 귀족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사스러움은 화려한 석조 건축기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나 중세 유럽의 귀족들도 부러워할 정도였을 것 같다.

월지관에서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할 출토 유물 중엔 목선(木船·나무로 만든 배)도 있다. 박물관 1층 가운데 전시된 것이다.

이 배가 발견된 것은 1975년 4월. 1천 년 이상 연못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목선은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옮기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심하게 부식돼 스펀지와 유사한 상태였던 목선은 3개월의 이동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햇볕 뜨겁던 여름날 20여 명 인부들에 의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와중에 선체가 두 조각으로 부러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며.

어쨌건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서 발견된 목선 중 가장 오래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궁과 월지의 나무배는 현재 월지관 환한 조명 아래서 21세기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천 년 전 그 배에 올랐던 신라 사람들은 지금의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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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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