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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조사·발굴을 통해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목간.
 동궁과 월지 조사·발굴을 통해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목간.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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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욕망과 욕구가 존재한다. 이 욕구와 욕망의 실현을 열망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2022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과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7~8세기. 막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가던 신라인들은 동궁과 월지를 비롯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불교미술의 꽃'이라 불러도 좋을 여러 조각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가 유적과 유물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동궁과 월지에선 2만 점에 가까운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적지 않은 양이다. 이 가운데 '목간(木簡)'과 '수세식 형태를 갖춘 화장실'은 욕망과 욕구 충족이라는 면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를 끈다.

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기록이란 작업은 보다 수월해졌다. 그런데 종이가 없던 시절엔 어디에 글씨를 남겼을까? 바로 목간이다.

무언가를 먹은 후 배설하는 건 고대인이나 21세기 인간이나 마찬가지. 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배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는 화장실의 형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그 정점에 있는 게 수세식 화장실이 아닐까.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을 통해 본 당대의 현실

목간은 무언가를 기록해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고대인의 욕망을 해소시켜줬다. 바로 그 목간을 <한국 고고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것으로, 나무에 새긴 것을 목독(木牘), 대나무에 새긴 것을 죽간(竹簡)이라고 한다. 두 가지를 구별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죽간이 발견된 사례가 없어 총칭해 목간이라 한다.

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에 사용됐다. 따라서 목간의 사용과 소멸은 종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간은 중국의 고대 유적을 비롯해 일본의 고대 유적, 인도나 로마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목간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정치·사회상이 기재돼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목간은 200여 점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들 목간에 관한 설명을 인터넷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나무위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5년 안압지(월지) 유물 발굴 과정에서 51점의 목간이 최초 출토된 이후 지속적으로 목간이 발견됐다. 2006년 기준으로 102점이 발견됐으며, 이후 계속된 발굴로 현재 200여점의 목간이 발견된 상태다. 몇 점을 제외하고는 안압지 북서편에 위치한 임해전지의 제4건물지에서 제5건물지로 통하는 이중 호안석축 아래서 수습됐다.

경주 월지 목간은 나무판의 위쪽에 홈을 내거나 구멍을 뚫어 끈을 묶고 어디에 걸거나 매달 수 있도록 했으며, 서체는 주로 예서체이나 간혹 초서체로 쓴 것도 있으며, 칼로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간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다.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 역시 마찬가지다. 목간에 쓰였거나 새겨진 글씨들을 통해 당시 신라의 관청명과 주요 건물을 경비하던 사람들의 숫자, 나아가 제작 연대까지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출토된 목간에 쓰인 '세택(洗宅)'은 왕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관청이고, 중국 당나라의 연호가 적힌 보응사년(寶應四年)은 765년이며, 궁궐을 경비하는 보초의 근무 상태를 기록한 목간을 통해서는 동궁의 구조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

한국고대사학회가 발행한 하시모토 시게루의 논문 '월지(안압지) 출토 목간의 연구 동향 및 내용 검토'에 따르면 "월지의 목간은 1975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목간으로 현재 어느 정도 내용을 알 수 있는 목간은 40여 점이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약재명,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쓴 습서 목간, 문호를 쓴 목간이 몇 점씩 있고, 가장 많은 것은 부찰이며 약 20점이 있다. 그중 14점은 '연월일+作(작)+동물명+가공품명+용기'라는 기재양식 으로 쓰인 식품 부찰이다."
 
동궁과 월지 일대에선 현재도 전문가들에 의한 심층적 조사와 발굴이 진행 중이다.
 동궁과 월지 일대에선 현재도 전문가들에 의한 심층적 조사와 발굴이 진행 중이다.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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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년 전 신라인들도 젓갈을 먹었을까?

식품 부찰(附札·기억할 만한 것을 표시하기 위해 글을 써 붙인 것)이라…. 여기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난다.

만든 날짜와 가공한 방식, 식재료와 담긴 용기의 재질까지를 기록한 목간을 해석한다면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특히나 동궁과 월지는 신라 귀족과 왕족의 주요 활동공간이었으니, 당시 상류층의 식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바로 이 목간일 터. 그들의 밥상에는 어떤 반찬이 차려졌을까?

이런 궁금증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낸 책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이 친절하게 풀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월지 목간 가운데 가물치(加火魚), 노루(獐), 돼지(猪), 새(鳥), 전복(鮑), 즙(汁) 등 각종 식품명이 기록된 것들이 있다. 이들은 연월일과 만드는 방법(作·治), 동물명과 가공품명 등을 적어 음식물을 보관하던 용기에 부착된 부찰 목간에 해당한다.

이 형식에서 연월일은 제작 일시, 작치(作·治)는 가공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동물명은 재료를 가리킨다. 특히 동물명 뒤에 오는 갑(醘), 해(醢), 조사(助史)를 우리말 식해와 젓갈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식품은 용기에 담아 물품창고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그랬다. 1천 년 훨씬 이전에도 사람들은 길짐승과 날짐승, 물고기 등을 가리지 않고 먹었고, 여기에 과일이나 채소를 길러 오늘날의 주스와 유사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 것이다.

통일신라의 고대인들이 각종 육류를 이용해 젓갈을 담그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이채롭고 재밌다. 젓갈을 만든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함으로써 숙성 시기를 표기하고, 유통 과정에서의 변질을 막아내기까지 했다니 신라인들의 식생활은 요즘 못지않았던 듯하다.

여기서 갑작스레 머리를 스친 생각 하나. 앞으로 7~8세기 신라를 소재로 TV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된다면 동궁과 월지에서 잔치를 연 신라 왕의 "오늘 가물치 젓갈은 유별나게 숙성이 잘 돼 입에 맞구나"라는 대사를 한 번쯤 넣어보면 어떨까?
 
7~8세기 신라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장실 변기 유구.
 7~8세기 신라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장실 변기 유구.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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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엔 이미 1300여 년 전 수세식 화장실이...

먹는 음식 이야기에 이어 화장실을 말하려니 민망하다. 그러나, 서두에 쓴 것처럼 배설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보편의 욕구. 피해갈 수 없는 스토리이니 이해를 부탁한다.

지난 2017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놀라운 사실이 보도된다. 동궁과 월지를 조사·발굴하던 이들에 의해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유구(遺構·과거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의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나무위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동궁과 월지의 신라시대 화장실은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함께 발굴됐다.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돼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땅 밑과 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화강암 배수로가 있는데, 현재는 땅 위에 있는 일부 배수로만 확인되나 실제로는 그 밑에 엄청난 길이의 배수로가 존재한다. 일부 배수로는 이를 따라서 월지 내부로 이어져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배수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효식품을 만들어내는 등 지혜로운 식생활을 즐겼음은 물론 배설하는 공간까지 기품 있게(?) 설계한 1300년 전 신라 사람들. 그렇기에 당시 동궁과 월지를 출입했던 왕과 왕자, 귀족들은 이미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과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하면 지나진 과장일까?

<세계사 개념사전>에는 전 세계 화장실의 역사를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거기엔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을 드나들던 여자들은 선 채로 화려한 여러 겹의 드레스 안에서 볼일을 보았고, 남자들은 기둥과 커튼 뒤에서 배설을 해결했다. 결국 지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테리어를 자주 바꾸고 향수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어느 나라보다 높은 프랑스. 최상류층이 무도회와 파티를 열던 17세기 베르사유 궁전에는 없던 화장실이, 그것도 수세식 화장실이 신라 동궁과 월지에는 7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다.

신라와 프랑스, 화장실과 관련한 아득한 1천 년의 간극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려지는 웃음을 어쩔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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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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