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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초기인 1970년대 중반 동궁과 월지를 찍은 항공사진.
 발굴 초기인 1970년대 중반 동궁과 월지를 찍은 항공사진.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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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은 인간 보편의 것이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와 미래를 궁금해한다.

미래는 현재를 통찰함으로써 일정 부분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살기 이전 시간인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을까?

고문헌을 통한 해석,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온 옛이야기의 채록과 종합 등 여러 가지 방식의 연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유물을 통해서 과거를 유추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매혹적인 궁원(宮院) 동궁과 월지가 어떤 모습이었고, 거기서 왕과 귀족들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적지 않다.

역사학계에 의하면 현재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만8000여 점이 넘는다. 월지와 주변 건물에서 나온 것이 1만5000여 점, 발굴 조사가 진행된 '가 지구'에서 1300점이 넘게 출토됐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연못 서쪽에 있는 5개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m 내외의 토양층에서 나왔고, 그 종류는 와전류, 용기류, 목재류, 토기류, 금속류, 철제류, 석제류, 동물뼈 등으로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다.

연못 속 유물들, 1974년 첫 모습을 드러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의 높은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은 언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땅 속에 그 형상을 감추고 있던 각종 유물이 1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환한 햇살 아래 나타난 것은 1974년이다.

그 요약된 과정을 이상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동궁과 월지)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는 경주시의 사적지를 15개 지구 단위로 구분하고, 이중 '월성지구' 개발에 안압지, 계림, 반월성을 포함하였다. 안압지는 준설 및 개수, 조림, 토지 매입이 주요 사업 내용이었는데 발굴조사는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연못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월성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궁성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974년 드디어 연못 준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를 비롯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해당 공사를 중단하고, 이듬해인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발굴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발굴 결과 '동궁과 월지'의 정확한 규모와 호안의 축조 상태, 3개의 인공섬과 입수·배수 시설, 주변 건물지의 배치 구조 등이 확인됐다. 이후 발굴 결과를 토대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정비 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통일을 위한 전쟁 과정에서 넓은 영토와 보다 많은 자산을 축적한 신라는 7세기 중반 화려한 궁궐과 정원을 만들며 국력을 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축조된 것이 동궁과 월지다.

그런 까닭에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신라 고위층의 생활방식과 주거양식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의 국교 역할을 했던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예술화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

동궁과 월지의 조사발굴은 1974년 이후 쭉 이어졌는데 1980년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해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했고,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해 노출시켰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일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해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 군대가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
 
동궁과 월지에선 신라시대 금동불상 등 유물 1만 점 이상이 쏟아져 나왔다.
 동궁과 월지에선 신라시대 금동불상 등 유물 1만 점 이상이 쏟아져 나왔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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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도 동궁과 월지의 유물 출토 과정과 실재했던 건물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

"1975년 안압지(월지) 준설공사 중에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2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200m·남북180m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대형 건물지군이 확인됐으며, '월지'명 유물들과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의봉은 당나라 연호로 의봉사년은 679년에 해당)'명 기와 등이 출토됐다. 이밖에 태자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는 전각과 동궁 예하 궁아들, 만수방과 같은 건물들이 거기에 존재하였다. 임해전의 정문은 임해문으로 추정되고, 또 동궁에 인화문이 있었으며,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보이는 여러 문들도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 번성기 고위층의 생활상 보여줘

그렇다면 신라가 통일 이후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동궁과 월지에선 어떤 유물들이 나왔을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 중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와전류(기와 종류)로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됐다고 한다.

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고, 전돌 역시 20여 종에 달한다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

그것들 외에도 치미편, 귀면와, 이형와 등 5700여 점이 출토됐다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서 보상화문 전편에 음각된 문양전을 통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고,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앞서 말한 '의봉4년개토'라 새겨진 명문 기와를 확인하면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기와류와 함께 각종 토기와 자기, 금속과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도 상당수 나왔다.

돌베개가 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에는 동궁과 월지 출토 유물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가 소개돼 있다.

이 책의 설명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들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의 본존은 화려한 연꽃의 2중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하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하고 서 있다.

본존과 보살에 별도의 두광이 있고 이를 감싼 큰 광배가 전체를 연결하고 있어서 완벽한 삼존 구도를 느낄 수 있는 높이 27㎝의 이 판불(板佛·동판 등에 새기고 채색한 불상)은 통일신라 전기의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금동초심지가위'도 이채롭다.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기품을 보여주듯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썼던 길이 25.5㎝의 이 가위는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고, 화려한 당초무늬 장식까지 갖췄다.

이외에도 당나라의 제작 기법을 따른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과 해학과 익살이 느껴지는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와', 고대 유물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나무로 만든 주사위(주령구) 등도 동궁과 월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귀한 유물들이다.

이 가운데 주령구(酒令具)는 신라인들의 술자리 놀이방식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흥미롭다. '위키백과'는 주령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1975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14로 균등하게 돼있다. 재질은 참나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발굴된 주령구에는 재밌는 벌칙(?)들이 쓰여 있어 신라 왕과 귀족들의 주석(酒席)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래가 없더라도 춤을 춘다' '다른 사람이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술 세 잔을 단숨에 마신다' '간지럼을 태우더라도 참는다' 등 주령구에 적힌 문구를 볼라치면 1천 년 전 신라 사람들 역시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조사와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동궁과 월지의 유물.
 조사와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동궁과 월지의 유물.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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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동궁과 월지의 본래 모습 제대로 재현하려면

앞서 언급된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를 쓴 이상준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현재의 모습이 동궁과 월지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당시에는 그 권역이 지금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한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 그는 동궁과 월지가 가지는 역사 속 위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생산돼 있는 고고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 '원래 범위에 대한 보다 철저한 확인' '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수로 조사·연구' '주차장지를 비롯한 남쪽 지역에 대한 재발굴'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는 비단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의 조사발굴만이 아닌, 다른 지역 역사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귀담아들을 가치가 충분한 지적일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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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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