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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장좌리의 당제(堂祭) 및 당굿은 무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다.당굿은 매년 정월 보름 해가 떠오를 때 장도와 사장나무거리에 있는 당집에서 행해진다.후박 동백 나무숲 속의 바다를 향한 맞배기와집인 당집에는 주신인 송징장군과 좌우에 혜일대사, 정연장군 외에최근에 장보고를 추가하여 모신다.
 완도 장좌리의 당제(堂祭) 및 당굿은 무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다.당굿은 매년 정월 보름 해가 떠오를 때 장도와 사장나무거리에 있는 당집에서 행해진다.후박 동백 나무숲 속의 바다를 향한 맞배기와집인 당집에는 주신인 송징장군과 좌우에 혜일대사, 정연장군 외에최근에 장보고를 추가하여 모신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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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제도는 그야말로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신라라는 나라의 골품제도로서 굳혀지면서 고려와 조선까지 무려 1500여 년동안 우리 모두를 옥죄는 간악한 제도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한 간악한 비인간적이고 인류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제도를 깨자는, 그러면서 실제로 깨뜨리고 나아가 주창했던 선도적인 지역이 완도였던 것이다.

송징장군의 이름이 완도에 많이 남아 있다. 송대장군이라고도 하고 또한 무(武)의 상징으로서 송징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의 이름이 황장소(黃腸所)였다고도 한다. 장보고 이후 완도에는 송대장군 즉 삼별초의 항몽의거 때에 완도에서 항몽을 이끌었던 송징 장군이 활약하게 된다. 

즉, 몽골과 친족관계가 된 여몽합방이 된 고려에 반대하는 강화도에 거주하는 삼별초들과 찬동하는 사람들이 오랑캐와 한 몸이 된 고려왕실을 버리고, 새로운 고려를 꿈꾸며 1,000여척의 배를 타고 남해안에서 가장 큰 섬인 진도와 완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고려를 구성한다. 

우리 역사에서 외세에 강점된 것이 1910년 한일합방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고려시대 1270년 여몽합방이 있었다. 

1910년에도 제일 먼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것과 마찬가지로 1270년에도 곧 바로 삼별초를 해산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합방을 선포한데 대하여 반대한 활동을 항일의병 혹 의거라고 하지만, 1270년 몽골과의 합방에 반대한 고려 사람들을 삼별초의 난이라고 부른 것이 우리 역사였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따라서 해산된 삼별초가 주동이 된 항몽의거였다고 해야 한다.

진도에 정통 고려임을 선포했다. 

진도도 정통이고 개경도 정통이라고 하면서 상호를 오랑캐라고 비난한다. 

진도 배중손을 중심으로 완도의 송징, 남해의 유존혁, 김통정, 노영희 장군 등이 고려 원종의 6촌인 온(溫)을 황제로 추대하고, 몽골과 친족관계가 된 것에 반대하여 결사항전을 외치며 일본에 사신를 보내 몽골의 침략에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미 몽골은 일본을 침략할 준비를 고려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린다.

일본에 보낸 편지 고려첩장에 의하면 오랑국은 몽골을 '위취(韋毳)'라고, 고려국은 악(惡)을 싫어한다고 하며 몽골을 악으로 보고 있다. 

또한 "강화도에 천도하여 약 40년을 지냈고 또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하여 고려 정통정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왕온을 황제로 칭하면서 고려왕인 원종을 몽골에 부역하는 꼭두각시로 평가했다. 곧 고려와 몽골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몽골 오랑캐와 친족관계가 된 것이다. 

몽골의 사위국가가 된 것이고 몽골 쿠빌라이칸의 손녀가 고려의 국모가 된 것이다. 진도에서 고려국이 선포된 이후 고려왕들은 시호의 앞글자에 몽골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忠)자를 넣고, 왕을 지칭하는 짐(朕)은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황제의 명령을 담은 글은 '성지'에서 '왕지'로 격하되었고, 다른 나라에 대한 사신도 일체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나라의 주권은 완전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항거한 것이다. 1271년 4월 24일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도의 적당(賊黨)이 관리와 백성을 노략질하고 30여 개의 섬을 함락하여 그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남해안 섬 30여개가 진도 고려국을 지지했으며, 장보고 청해진 이후 처음으로 여몽합방에 반대하는 압해-청해-진해에 이르는 해상왕국이 건설된 것이다. 

비록 몽골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좌절되었지만 만일 진도의 고려가 몽골에 승리했더라면, 장보고 이후에 우리 역사는 새로운 차원의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서남해안 대부분의 백성들은 항몽의거에 적극 호응했음을 또한 말해주고 있다. 경상도에서는 몽골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와 개경정부 고위관직자들을 처단하고 진도에 호응했고, 전국 각지에서 항몽의 불길을 타올랐다. 이에 당황한 몽골은 협상을 요청하고 회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진도 고려국은 몽골군의 철수 및 압해-청해-진해에 이르는 서남해안 일대의 점유 인정 등을 요구하였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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