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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백록담)에서 쉬거나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
 한라산 정상(백록담)에서 쉬거나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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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사전 예약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2020년 2월 1일부터 한라산 정상을 등산할 수 있는 성판악 코스는 하루 1000명, 관음사 코스는 하루 500명 등 총 1500명으로 등산객을 제한하여 사전예약을 받고 있다. 이와 별도로 정상(백록담)까지 등산할 수 없는 돈내코와 영실, 어리목 코스는 기존대로 운영하고 있다.

이 코스는 백록담이 아니라 윗세오름 대피소나 남북 분기점이 최종 목적지가 된다. 탐방예약을 한 후 탐방을 못할 경우 꼭 취소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추후 페널티가 적용되어 한라산 탐방예약 및 정상 등산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사전 예약은 한 달 전부터 가능하다.
  
한라산 백록담
 한라산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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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라산이 인기가 많다는 것을 산행을 예약하면서 실감했다. 실은 처음 예약을 시도한 것이 아니다. 하이킹을 좋아하는 나는 올레를 걷기 위해서 짬짬이 시간을 내서 제주도에 갈 때면 하루 정도 여유를 두고 한라산 산행을 하곤 했다. 그때는 하루 전날 예약을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달랐다. 1월 16일에 제주도에 와서 예약을 했지만 '마감'이라는 메시지만 떴다. 다음 날짜를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오기로 날짜를 하루씩 밀치면서 계속해서 시도했고 그 결과 2월 9일에야 산행 허락을 받았다(한라산 등반 예약이 치열해진 것을 두고 피 튀기는 티켓팅, 일명 '피케팅'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예약 QR코드가 암거래된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렵게 예약한 한라산, 순전히 한라산만을 생각하며 2월 8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을 했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숙소는 성판악 등산로 입구까지 버스로 27분 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정했다. 대중교통은 오전 6시부터 운행되고 6시부터 성판악에서는 등산로 출입이 허용된다. 나는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입장이 허용된 QR코드를 받아두었다.

5시 51분에 성판악주차장이 '만차'라는 국립공원 측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과 삼각김밥으로 요기한 뒤 6시 15분 버스를 타고 45분에 도착해서 아이젠 착용 등 장비를 정리했다. 그렇게 등산로로 발을 디딘 시간은 6시 57분이었다. 드디어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대피소의 달콤함
  
눈길  등산로
 눈길 등산로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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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이미 성판악은 사람들이 많았다. 뭉쳐 놓은 눈더미도 그 높이가 상당해서 약간 걱정을 했는데 헤드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로 등산로를 두껍게 다져놓은 눈길은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물론 주위 풍경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달빛처럼 은은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의 왕복 거리는 대략 18km(사라오름 제외)이다. 9km를 올라가면 그만큼 내려와야 한다. 그 길목에 대피소 두 곳이 있다. 출발지에서 4.1km 지점에 있는 속밭, 백록담을 1km를 남겨둔 지점에 있는 진달래. 진달래 대피소는 12시 이전에 통과해야 하고 정상에서는 2시 전에 하산해야 한다. 하산 시간까지 계산한, 안전 산행을 위한 '제약'인 셈이다.

차차로 높아지는 등산로를 걷다가 대피소를 발견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그곳에서는 꼭 쉬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생긴다. 배낭을 벗어놓고 챙겨 온 간식을 먹으면서 땀을 식힌다. 화장실까지 들러서 다시 걸을 채비를 단단히 하는, 말 그대로 '쉼터'이다.

한라산만의 풍경
 
눈과 구름과 검은 바위들
 눈과 구름과 검은 바위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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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산행은 다른 때와 달리 내게는 힘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모든 등산로에 눈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일에는 내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내린 눈이 족히 어른 무릎 높이 정도 되었다.

그러나 앞서간 사람들이 단단하게 다져놓아서 부드러운 흙처럼 촉감이 좋았다. 한라산 등산로는 데크 계단과 돌멩이가 많기로 유명하다. 발바닥이 쉽게 지친다. 그런 장애물을 모조리 눈이 감싸버린 것이다. 대신 아이젠을 꼭 착용해야 한다.

그야말로 축복받은 날씨이기도 했다. 7시부터 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왼쪽 옆구리에서 따라오다가 등 뒤로 물러날 때까지는 양 뺨과 귀가 어둠이 품은 매서운 공기로 시려왔지만 해가 정수리 위로 올라갈 때에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나무 갉아대는 소리를 내던 딱따구리 대신 시커멓고 덩치 큰 까마귀가 시도 때도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말이다. 어떨 때는 '떼창'을 하기까지 했다. 한라산만의 풍경이었다.
  
말라버린 구상나무
 말라버린 구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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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들
 고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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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한라산이구나, 라는 풍경은 진달래대피소를 지나야 더욱 뚜렷해진다. 구상나무 덕분이다. 고목은 고목대로 그 마른 나뭇가지 형태가 신비롭고, 한겨울에도 시퍼렇게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는 나뭇잎은 고드름을 장식물로 달고 있다.

그곳에 붉은색 왕방울만 달아놓으면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것만 같다. 눈이 살포시 얹힌 것 또한 운치를 더한다. 푸른 하늘에 윤기 흐르는 까마귀가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천상의 그림이다.

천상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육체의 고됨이다. 그런데, 1800m 정도의 높이에서는 이상하게 탄성을 지르고 나면 무거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마법'도 체험할 수 있다. 앞서가거나 뒤따라오는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자주 멈춰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른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사치 
  
한라산 구상나무에 매달린 고드름
 한라산 구상나무에 매달린 고드름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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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눈밭인지 눈밭이 하늘인지
 하늘이 눈밭인지 눈밭이 하늘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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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한없이 이어진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90도 각도다. 그야말로 천근만근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을 한 발 한 발 데크 계단으로 올려놓아야 한다. 너무 상심할 것까지는 없다. 잠깐잠깐 여유를 부리며 뒤돌아보면 사라오름의 둥그런 호수, 마을과 산 그리고 구름이 만들어 놓은 비경들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이다. 맘껏 누려도 된다.
  
하늘로 한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은 계단
 하늘로 한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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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향하는 계단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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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등산은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삼라만상을 오롯이 느끼기 위한 걸음걸음이 아닐까. 힘들게 오르는 와중에도 여유를 가져야 하고, 하산할 때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되레 신중해야 한다는, 인생의 지혜를 주기 위한 활동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산행이 마치 인생의 여로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1950m에 올라선 나는 커다란 가마솥에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백록담을 향해서도, 제 몸을 변형하며 광활한 하늘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구름을 향해서도 신나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말이다.
 
사라오름이 보이는 풍경
 사라오름이 보이는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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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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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한라산 산행은 2022년 2월 9일 아침 6시 57분에 성판악을 출발해서 10시에 백록담을 찍고 하산하여 성판악에서 12시 36분에 마무리했습니다. 총 18.74km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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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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