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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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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충분히 들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노동조합 활동에 사활을 걸었던 10대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 싸우는 여자들의 기록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언덕에 미싱 3대가 놓여있고, 언덕을 넘어 3명의 여성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이 웃으며 나타나면서 <미싱타는 여자들>은 시작된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시다였던 그들은 청계피복노조 간부이고 조합원이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 열사의 유지를 이어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 세워진 민주노조였고, 당시 많은 조합원이 중고등학생 나이의 청소년 여성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어머니로 부르며 노조의 공간 '노동교실'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소선 여사가 잡혀가고 노동교실이 강제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결사투쟁'을 벌인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의 활동 중 실패한 투쟁으로 기억되던 이 '99투쟁'(1977년 9월 9일, 청계피복노조원들이 노동교실 강제 폐쇄에 맞서 교실에서 농성을 벌이다 폭력 진압된 사건) 당일과 이후의 삶을 주인공 여성 3인과 동료들이 어떻게 겪어냈는가 세밀하게 들려준다. 투쟁하는 여자들의 높은 기개, 깊은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긴 세월 동안 간직해 온 동지애… 역사책에 적혀진 '여공'의 기록을 넘어 투쟁하는 '주체'의 삶을 충분히 들여다보려 애쓴 작품이다. 

죽음을 불사한 여성청소년 노동자

99투쟁은 노조 상층부의 결정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잡혀갔는데, 이렇게 노동교실을 뺏길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절박한 결의로 단행된 사건이었다. 무지막지한 공권력 앞에 어린 노동자들이 던질 수 있는 건 자신의 몸 밖에 없었다.

노동교실로 쳐들어오는 경찰을 저지하려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누군가는 할복을 했다. 15살 임미경도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결을 시도했다. 선혈이 낭자한 아비규환, 이들의 농성은 곧 진압되었다. 누가 어디로 잡혀가 며칠을 구류됐었는지도 모르게 농성 참여자들은 후루룩 잡혀 들어갔다. 

폭력의 시대, 폭력으로의 경험은 어린 노동자들에게 큰 상흔을 남겼다. 조합원들의 열정은 이후 크게 위축되었고, 현장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는 공안의 사찰에 숨죽인 세월을 살았다. 제2의 전태일을 불사했던 소녀는 결혼하고 아이들이 장성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청계피복노조 시절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 출연 제의도 어렵게 받아들인 그는 스크린에서 꾹꾹 눌러뒀던 기억과 눈물을 터뜨리듯 쏟아냈다. 

노동교실, 그게 뭐라고

생각해 보면, 그냥 공간 하나였다. 그게 뭐라고 노동자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까? 소중하지 않은 것이란 뜻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까지 지켜야 하는 그렇게 특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때는 그런 시대니까, 저항의 모습도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라고만 하면 99투쟁의 그 극렬함을 잘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일찍이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왔던 어린 소녀공들에게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짜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밤샘 작업에 미싱 바늘이 손으로 박혀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코피를 쏟으며 일하는 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엄마 말이다.

배울 수도 없고 여가를 즐길 수도 없는, 옷 만드는 기계처럼 노동 외의 삶이 없는 자들에게 노동교실에 가면 공부를 가르쳐 주고 사회를 설명해주었다.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다큐 속 흑백사진들이 보여주듯, 노동교실에 가면 언니 동생 친구를 사귀고 야유회를 가고 합창 동아리를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했다.

어쩌면 세상을 만나고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창구, 노동교실은 평화시장 청소년 노동자들에게 가족과 친구, 자아와 여가와 같은 진정한 삶을 돌려주는 곳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침탈하려고 한 것은 노동조합이 갖고 있는 일개의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 시민의 삶 전부였던 것이다. 

지금, 운동이 돌려주어야 하는 노동자의 삶은 

12시간씩 일하고도 달려가던 노조의 노동교실. MZ 노동자(바로 나 역시)가 들으면 기함할 일이다. 그렇다고 현시대의 노동자가 투쟁과 운동에 열정이 없다는 둥 쉬이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미싱타는 여자들>의 70~80년대 선배 노동자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의 운동이 '지금의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삶은 무엇일까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자본의 심화된 폭력성이 세련되게 무장한 정치권력과 손잡은 이 시대, 노동자 시민의 정체성도 근로조건이나 고용형태 외 젠더·성적지향·인종·장애·나이 등 여러 카테고리가 얽혀 다양하게 형성된다. 팬데믹과 생태문제 등 지구환경의 차원의 거대한 위기도 생활세계의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다. 

이런 시대를 사는 노동자-시민-민중이 함께 지향할 가치와 삶은 무엇인가? 다양성과 혼란의 시대에 운동은 이 질문에 진심으로 조응하고 있는가, 운동으로 어떠한 삶을 돌려받을(줄) 것인가? 

솔직한 말로 이 질문에 딱히 답이 잡히질 않아 답답증이 생긴 지 오래다. 하지만 이 다큐의 마지막 장면, 뿔뿔이 흩어져있던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한데 모여 '흔들리잖게'를 담담히 합창하던 모습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같은 고민을 하며 분투하는 동지들과 '흔들리지 않고' 엉킨 실타래를 뚫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정하나님은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정책국장으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발간하는 '일터' 2022년 3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여성_노동자, #미싱타는_여자들, #청계_피복_노동조합, #노동_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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