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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린 신라의 왕들.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린 신라의 왕들.
ⓒ 이건욱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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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탄탄한 정치·경제적 토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고,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화원을 조성하고, 신하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공간을 만들고, 왕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줄 궁전을 축조하는 왕은 없거나 드물 듯하다.

경주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왕국 신라가 만든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에서 동궁과 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적 제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제30대 문무왕 14년(674) 2월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953년 신라가 고구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262년간 왕이 군신(群臣)을 위해 항연을 베풀었던 장소이자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명처럼 동궁과 월지는 7세기 중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국력과 나라의 기세가 약했을 때는 아닐 것이다.

태종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성기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신라사 총론>은 위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

"신라 중대(654~780)는 제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

앞서의 언급처럼 '신라 중대'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면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이 통치했던 7세기 중후반은 신라 번영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진 때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만들어 통일신라의 골격을 형성시킨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굴복시킨 태종무열왕은 654년부터 661년까지 신라를 통치했다. 그의 이름 김춘추는 굳이 역사서만이 아니라 신라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태종무열왕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두산백과'가 소개하는 것들을 인용하면 이렇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
ⓒ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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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眞骨) 출신의 최초 신라 왕이었다. 그는 정치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당대의 거물 김유신의 누이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이유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 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아버지가 닦아 놓은 터전에서 통일 이룬 문무왕

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신라 제30대 왕에 오른 문무왕은 김유신 등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제압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661부터 681년까지 20년간 신라를 통치했다.

'동궁과 월지의 건설자'이기도 한 문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삼국 통일>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 '이 시기의 예술세계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통일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헌신적 지도력, 신라 화랑의 빛나는 용기 등에 대해서도 신라 당대부터 끝없는 찬사가 이어져왔다."

<인물한국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태종무열왕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서술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군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던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태종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동궁과 월지 등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을 여럿 만들어낸 문무왕은 죽음과 묘지 선택까지 드라마틱했다.

그의 묘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 바위 아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은 이를 '문무대왕릉'이라 부르고 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의 유택(幽宅)이 땅 위 거대한 봉분 속이 아닌 유실의 위험성이 높은 바다 한가운데 마련된 이유는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막아 내겠다"는 문무왕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 '성공한 군주'라 평가 받는 문무왕이지만, 그와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에 관해서는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다.

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 있다.

"한국사 교과서나 개설서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잃어버린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통일의 한계점을 강조하는 부정적 시각도 반드시 곁들여져 있다. 심지어 '신라의 삼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며, 단지 백제의 멸망에 불과하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서 양국시대 또는, 남북국시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까지도 나와 있다."

신문왕, 장인까지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하다

문무왕 사후 신라 제31대 왕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자다. 태자가 된 것은 665년, 681년에 왕의 자리에 올랐고 12년간 재위했다. 그는 신라 역사 속에서 강력한 전제 왕권을 만들어낸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자리한 신문왕릉.
 경주시 배반동에 자리한 신문왕릉.
ⓒ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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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은 <인물한국사>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장인까지 처형한 신문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681년 7월 1일 삼국 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인 8월 8일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湌) 흥원, 대아찬(大阿湌)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은 삼국 통일까지의 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신문왕이 즉위 직후에 그들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사학계는 처가의 호가호위(狐假虎威)와 왕 주변에 포진한 귀족들의 저항을 싹부터 잘라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보고 있다. 이 추정은 김흠돌 처형 이후 신문왕이 왕의 권력과 권위를 넘볼 이들이 없는 집안의 여자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다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던 7세기 중후반은 삼국 통일에 이은 왕권 강화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별다른 걸림돌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으로 이어진 이 시기는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불리는 8세기 초중반의 토양으로 역할하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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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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