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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한동안 '부캐'를 내세운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부캐'는 원래 게임에서 본래 계정이나 캐릭터 외에 새롭게 만든 '부캐릭터'의 줄임말이었다. 이것이 2020-2021년 트렌드 코리아에서 언급한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와도 통하는 개념이 되었다. 즉, 평소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로 '부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결혼 10년차, 아홉 살 난 남자 아이 하나를 키우는 40대 엄마이면서 14년차 직장인이 '본캐'인 나도 '부캐'가 있다. 바로 '그림책 좋아하는' 어른으로서의 나다. 아름답고, 흥미진진하고, 가슴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그림책의 온기로 위안을 얻는다. '본캐'가 아닌, '부캐'로서의 나는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고, 꿈꾸는 바를 주저하지 않고 배우고 시도하는, 이상적인 사람으로 바뀐다.

우연히 만난 그림책
 
어느날 내게 말을 걸어온 돼지책
▲ 돼지책 어느날 내게 말을 걸어온 돼지책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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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이에게 읽어주려 펼쳐든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보며 울컥했다. 표지 그림 속, 웃으며 정면을 보는 사내 아이 둘과 남편을 등에 업은 채 영혼 없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피곳 부인. 첫 장면의 가족 사진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 눈, 코, 입이 생략된 채 가사노동을 하고 출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였다. 가정과 회사에서 '덜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던 내가 늘 직간접적으로 요구받는 모습이 그림책 안에 있었다.

<돼지 책>이 남긴 여운은 오래 갔다. '그냥 아이들이 읽는 책인 줄 알았는데...' 하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그림책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내 성향도 한몫했다. 궁금한 마음에 그림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책을 그저 아이에게 읽히고픈 엄마로서의 마음이 컸다. 인터넷을 뒤지고 좋은 그림책을 소개하는 글들을 찾아 읽었다. 부산에 사는 내가 서울에서 열리는 그림책 읽는 모임까지 찾아가 그림책 읽는 법을 배우고, 생각을 나눴다.  

그곳에서 의외의 경험을 했다. 하나의 주제에 맞는 다양한 그림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서로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느낀 바 대로 해석이 다른데도 판단과 평가 대신 공감과 위로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신기했다. 

일본 최초로 그림책 테라피 프로그램을 만든 오카다 다쓰노부의 <그림책 테라피가 뭐길래?>에 따르면 그림책은 인간 공통의 정서를 다루고 있어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린 아이들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기 때문에 독자 자신이 체험한 바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했다.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어도 그림책을 읽으며 든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수용을 받다보면 그 자체로 자기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이다. 내가 모임에서 경험하고 느낀 바가 그대로 글에 담겨 있었다. 

그림책의 세계가 더 궁금해졌다. 이제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져갔다. 용기를 내어 인터넷을 통해 그림책 읽는 어른들을 모았다.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1년간 매월 그림책을 읽고 나눴다. 블로그에 매주 그림책 소개를 했고 성인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테라피도 진행했다. 늘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던 현실의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림책과 함께 한 시간은 주어진 역할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현실의 내가 잊고 있던 '또 다른 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주부이자 엄마로 나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내달리느라 말라있던 내 삶에 생기가 돌았다. 바스락거리던 마음에 물기가 차오르자 까맣게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하나 둘씩 차올랐다. 오래도록 품었던 글쓰기를 시작할 용기를 낸 것도 그림책의 도움이 컸다. 

엄마에게 너그러운 그림책
 
아이와 갈등이 생길 때 그림책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은 열쇠가 되어 주기도 한다.
 아이와 갈등이 생길 때 그림책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은 열쇠가 되어 주기도 한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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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읽으면서 나타난 나의 변화는 아이와의 관계 변화로도 이어졌다. 엄마는 처음이라 서툴고 막막하기만 했다. 부족한 점을 메우려고 읽은 육아서는 나를 더 기죽게 만들었지만 그림책은 너그러웠다. 필리스 레이놀즈 네글러의 <놀이터의 왕>에 나오는 아빠 같은 인물을 보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 나갔다. 많은 것을 해주는 것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림책은 어린이가 만나는 최초의 문학이다. 문학 작품은 삶에 꼭 필요한 가치들을 담고 있다. 그림책의 내포 독자는 어린이들이지만, 아이들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건 어른이다. 부모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그림책과 만나면서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그림책은 책을 읽어주는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더 좋은 부모, 나아가 좋은 사람이 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이다. 소중한 추억이다. 우리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날그날 그림책을 골라 읽는다. 전형적인 남자 아이라 표현이 부족해도 그림책을 읽다보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술술 나온다. 그림책이 각자 하루를 보낸 우리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주는 셈이다. 

아이와 갈등이 생길 때 그림책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은 열쇠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림책을 읽고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면서 아이도 나도 조금씩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또 타자를 이해해 보려는 모습을 배우기도 한다. 그림책 속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이런 성장을 가능하게 돕는다.

성장을 돕는 그림책

아직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면, 한 권이라도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오래 읽히는 좋은 그림책은 짧은 글이 미처 전하지 못한 서사를 그림이 전하고 있어 부모가 읽어주면 그림도 충분히 살펴볼 여유가 생긴다. 이것은 아이들의 창의력과도 연관되니 빡빡한 일정으로 시간에 쫓기는 요즘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기회도 되어 준다.

생각해 보면 아이와 그림책은 닮은 점이 많았다. 잘 만들어진 그림책에는 존재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있었다. 아무리 부족한 엄마라도 엄마 그 자체로 믿음과 사랑을 주는 아이처럼, 그림책도 그랬다.

그림책을 읽는 것만으로 조건 없는 포용을 받고 나면 아무리 형편 없더라도 조금은 더 괜찮은 나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힘이 났다. 다시 좌충우돌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림책이 준 온기와 위안이 마음속에 남아 나를 지탱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림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가슴 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감정들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어른이 되면서 누르고 숨겨둔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그 감정들을 밝은 곳으로 꺼내 위로하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가까이 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m.blog.naver.com/uj0102
https://brunch.co.kr/@mynameisred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워킹맘부캐생활, #그림책읽는어른, #그림책한권의힘, #아이와교감, #문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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