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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려앉은 겨울 산책로
▲ 겨울 산책로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겨울 산책로
ⓒ 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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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처리할 일이 한가득했다. 긴 한숨을 내쉬고 보고서의 첫 줄을 작성하려는 순간, 사내 메신저 불이 깜박였다.  

'날이 참 좋네요. 형님. 오늘은 점심때 공원 산책 어떠신가요?'
'당연히 좋지. 정시에 바로 나가자고! ♡'


중년 아재의 부끄러움은 저만치 밀어놓고, 하트까지 보냈다. 회사 동기이지만, 나보다 두 살 아래라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는 동료의 점심 산책 제안이었다. 이때부터 마음속에는 설렘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는 찰나에 점심을 알리는 사내 방송이 울렸다. 책상 밑에 놓아두었던 운동화로 갈아신고, 장갑과 귀마개를 챙겨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1층에는 길벗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식당 대신 산책을 갑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이때부터 우리는 수다 꽃을 피운다. 집에서 한창 사춘기 아이 때문에 속상했던 이야기,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 혹은 시답잖은 농담까지 대중없다.

어느새 정문을 통과하면 찻길 사이로 길게 들어선 나무들이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듯했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었다.  

그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고 바로 오른쪽에 놓인 계단을 내려가면 물이 흐르는 작은 하천이 보인다. 사이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면 그제야 공원 입구에 다다른다.

날이 풀려서였을까. 공원에는 걸으며 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좀 더 걸어가 왼편 아래로 내려가면 그림같이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난다. 앞에 놓인 벤치에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쉼을 갖는다.  
 
하얀 눈이 쌓여 아름다운 겨울호수.
 하얀 눈이 쌓여 아름다운 겨울호수.
ⓒ 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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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호수를 바라본다
▲ 가을 호수 앞 벤치 가을에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호수를 바라본다
ⓒ 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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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살얼음이 하얗게 깔린 세상을 눈에 담으며 등 뒤로 흐르는 땀을 식힌다. 이때가 참 좋다. 뭐랄까. 복잡한 일에서 잠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무념무상을 즐긴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짓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비밀을 공유한 듯. 

이렇게 점심시간에 걷기 시작한 게 벌써 3년이 다 되었다. 본사 발령 후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예산 업무를 맡게 되어 멘붕에 빠졌다. 실수 연발이고 나 자신이 한없이 위축되고 작아졌다.

회사 생활도 나름 10년이 훌쩍 넘었고, 보통 이상은 해왔다고 자부했는데, 신규 직원처럼 헤매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더구나 마흔 이후 심리적 공허함까지 더해져 이대로 가다간 뭔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길 아래에 있는 작은 개울
▲ 길 옆의 작은 개울 길 아래에 있는 작은 개울
ⓒ 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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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심때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그냥 길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공간이 다르게 다가왔다. 높게 솟은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길옆으로 조그만 개울도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왜 그간 보지 못했을까. 늘 고민 속에 빠져 지내느라 놓치고 있었다. 

삼십 분 정도 걸었을까. 몸이 이완되며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륵 사라졌다. 복잡한 생각도 정리되고,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생기가 돌았다. '아 좋다. 좋아'란 말이 절로 나왔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발바닥도 후끈거리고, 셔츠에도 땀이 가득 찼다. 하지만 불편함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기분 좋음이 온몸 가득 퍼졌다. 오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바쁘고 힘듦의 연속이었지만, 전과 달리 걸으며 풀어냈다.  

밥 먹자는 말대신 같이 걷자는 동료들

매일 걷다 보니 만 보를 훌쩍 넘겼고, 자연스레 친구 같던 뱃살도 빠졌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특히 아무리 노력해도 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는데 드디어 낮아졌다. 의사 선생님이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냐는 물음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저 걷기만 했는데,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건강해졌다.

또 하나 변화는 함께 걷는 길벗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제 사무실에서 누구 하나 점심 먹자는 말을 권하지 않는다. 으레 걷겠거니 한다. 호기심에 한두 번 따라오던 동료들도 걷기 매력에 푹 빠져 이제는 먼저 걷자고 난리다. 좁은 사무실에서 말도 없이 일만 하다가 이렇게 걸으며 농담도 하고, 삶의 고민도 나누면서 자연스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은 관계로 일까지 수월해졌다. 

더구나 코로나가 장기화 하면서 나의 점심시간 걷기는 더 빛을 발했다. 친구를 만나기도, 어디 밖에 나가기도 쉽지 않은 요즘, '코로나 블루'라 불리는 무기력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뉴스 속 인물이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나였다. 종일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면서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걸어서 해소할 수 있었다.

점심 대신 산책하며 잠시나마 바깥 공기를 마시며 길벗과 소통하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 소중한 시간이 되어 주었다. 우연히 시작한 걷기가 힘든 삶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놀랍고 신기하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아무리 힘든 일이 찾아와도 이렇게 걸으며 털어내면 그만이다. 회사에 출근하며 또 어떤 길로 걸을까 기대하며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은 날도 포근하니 뒷산으로 가볼까. 겨울의 무거운 옷을 벗고, 봄을 맞이하는 생생함을 만끽하러.
 
회사 뒤편에 있는 봄 산 정상에 올라
▲ 봄산 회사 뒤편에 있는 봄 산 정상에 올라
ⓒ 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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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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