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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최초 복간본 해설자로서 훈민정음의 사실과 진실을 알려주는 글을 씁니다. [편집자말]
세종이 1446년에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한문본)에는 겉으로 드러난 내용 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예도 있다. 그중에서도 세종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에는 훈민정음 보급(반포) 사업이 세종 이도와 문종 이향이 함께 한 즐거운 사업(君虯快業)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전문가들조차 잘 모르는 이야기다.

세종은 자신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에서 기본 28자와 된소리글자 6자를 합친 34자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한자를 보기로 설명하고 있다. 어금닛소리(여린입천장소리) 자음만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보이면 다음과 같다.
 
옛글자 깨짐 방지 이미지
▲ 옛글자 포함 본문 이미지 옛글자 깨짐 방지 이미지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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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과 음가를 함께 제시하고 있는데 'ㄱ – ㄲ – ㅋ -ㆁ(옛이응)' 순서로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자음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초성 17자와 각자병서 6자의 글꼴과 예(전탁 글자는 글꼴로는 드러나지는 않음)
▲ 초성 17자와 각자병서 6자의 글꼴과 예 초성 17자와 각자병서 6자의 글꼴과 예(전탁 글자는 글꼴로는 드러나지는 않음)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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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금닛소리를 설명하기 위해 보기를 든 '君虯快業(군뀨쾌업)'이 바로 "임금(君)과 왕세자(虯)가 함께 이룩한 즐거운(快) 과업(業)"이라는 뜻이다. '虯'는 '새끼용 뀨(규)'로 새끼용은 세종 당시에서 보면 바로 왕세자, 문종 이향을 가리킨다. 훈민정음(언문)은 반포하기까지도 세종과 왕세자가 함께 했지만, 앞으로도 대를 이어가야 하는, 만백성을 즐겁게 할 사업이라는 의미다.

이 네 글자의 의미를 처음으로 밝힌 이는 임홍빈 서울대 명예교수다. 2008년에 발표한 "訓民正音 創製와 관련된 몇 가지 問題.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 Workshop 조직위원회 편.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 국제 학술 Workshop 논문집>. 한국학중앙연구원. 163~195쪽."에서 "임금과 왕자가 일을 좋아한다"라는 의미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의미는 네 글자의 맥락적 의미를 좀 더 정확히 드러내 주지 못한다. 이런 의미라면 그냥 평범한 '일벌레' 정도의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과 문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첫 장(두 쪽)의  ‘君?快業’
▲ 세종과 문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첫 장(두 쪽)의 ‘君?快業 세종과 문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첫 장(두 쪽)의 ‘君?快業’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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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네 글자 의미에 주목한 이는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이다. "世宗의 富國 精神-訓民正音 子音명칭에 담긴-, <한글+漢字 문화> 2018년 10월호"에서 "군왕과 용왕(虯 용 뀨)이 기뻐하는 과업"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새끼 용'을 용왕으로 더 크게 부각했으나 이렇게 보면 '용왕'이 주는 상상의 의미가 부각되어 훈민정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실상 현실과는 동떨어진 해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훈민정음 공시문(반포문) 자모규정의 처음 시작에서는 "임금과 왕세자가 함께 한 즐거운 과업"라고 옮기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런 의미는 세종이 의도적으로 부여했다고 봐야 한다. 창제(1443년) 전이나 창제 후 반포 과정에서 왕세자가 직간접으로 부왕을 도왔고 더불어 왕세자를 통해 이 사업이 이어가야 할 즐거운 국가 대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 1443년 이후 공식적으로 세종을 도와 1446년 반포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1443년 창제 과정은 비밀 사업이었지만, 세종이 왕세자한테까지 비밀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제 직후에 최만리 등 7인이 올린 상소문에서도 언문 같은 하찮은 사업에 왜 왕세자까지 끌어들여서 하느냐고 비판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왕세자가 세종을 보필한 기간은 1421년(세종 3)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니, 무려 30년 가까이 된다.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왕세자에게 행정 처리의 전권을 넘기려 했던 것은 창제하기 9년 전인, 1436년(세종 18년)으로 이때 왕세자의 나이는 23살이었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설적 상황 설정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때 신하들의 반대로 표면적으로 권력 이양을 하지는 못했지만, 실제 왕세자는 세종을 여러모로 돕게 된다.

창제하기 1년 전인 1442년에는 세자가 섭정(攝政)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였고 첨사(詹事)ㆍ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고,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하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반포 1년 전인 1445년부터는 세자가 섭정하게 되고, 이 섭정은 세종이 승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문종이 비록 병마로 임기가 2년 3개월 정도로 짧았지만, 훈민정음 보급 사업을 이어갔으니 해례본의 자모 규정에서 보여준 자모 대표자 "君虯快業(군뀨쾌업): 임금과 왕세자가 함께 한 즐거운 과업"은 사실일 뿐 아니라 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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