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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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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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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모험담이자 생존기다. 핵전쟁이 터진 위험한 상황 속에서 영국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적군의 요격을 받아 추락하자 소년들은 태평양의 외딴섬에 비상 탈출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탈출에 성공한 20여 명의 소년들은 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5살에서 12살 사이의 소년들로 구성된 이 작은 무리에서 소년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대장을 뽑는 일이었다. 덩치가 크고 나이가 많은 12살의 랠프가 대장으로 선출되고, 돼지라는 소년이 그를 돕는다. 랠프와 돼지는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고, 소년들에게 대장의 지시와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정해주는 등 리더의 역할을 한다.

또한 랠프는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히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섬의 높은 곳에서 연기를 피워 올려 외부의 구조를 받아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랠프는 소년들에게 "우리는 구조될 거야"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자 두려움에 휩싸여있던 소년들은 확신에 찬 랠프의 말에 환호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자연스럽게 "랠프를 좋아하고 거의 존경한다."

이렇게 랠프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소년들의 불안을 달래주고 그 자리에 기대와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그들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그 힘은 소년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력이 되고, 랠프는 그 힘으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 랠프의 이런 막강한 권력은 경쟁자 잭이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잭은 랠프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인물이다. 무인도에서 구조되는 것에 공동체의 목표를 두었던 랠프와 달리, 잭은 당장 섬에서 잘 먹고 즐겁게 지내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 데에 관심이 많다. 민첩하고 행동이 빨랐던 잭은 멧돼지를 사냥해서 소년들에게 고기 맛을 보여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희망을 걸지 말고, 자신을 따라 멧돼지 사냥을 하자고.

소년들은 잭이 제공해 준 "고기 맛과 안전의 편의"를 마음껏 즐기면서 점점 잭에게 동화되어 간다. 잭을 따르는 소년이 늘어나고 얼마 안 가 잭의 무리는 랠프의 무리를 위협할 만큼의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소년들의 공동체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다투게 된다.

이후 벌어진 두 세력의 주도권 싸움에서 결국 잭의 무리가 승리한다. 힘이 세진 잭은 패거리를 지어 랠프 무리를 약탈하고, 급기야 돼지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소년들은 먹을 것에 탐닉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야만의 상태에 이른다. 랠프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잭의 무리에서 벗어나 도망을 다니다가, 벼랑에 끝에 몰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영국의 구조대가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문명적 기반이 없는 무인도의 고립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회를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는지, 나아가 그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와해되는지를 소년들의 권력 투쟁을 통해 보여준다.

소설에서 보여주듯이, 권력은 구성원들이 가진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하여 그 힘을 키운다. 랠프가 소년들에게 섬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 것과 같이, 잭 또한 일부러 거짓 공포를 조성하여 소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후 다시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잭은 숲속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돼지머리를 창에 꽂아 숲의 높은 곳에 세워둔다. 무서워하는 소년들에게 잭은 이곳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이렇게 두 권력은 각자의 방식대로 권력을 쟁취해 나가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결국에는 공동체가 가진 결함으로 무너지고 만다.

윌리엄 골딩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외관상 훌륭해 보이는 정치체제나 제도가 아닌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두머리들의 권력 싸움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권력을 둘러싼 소년들의 행동들이다. 랠프 쪽에서나 잭의 쪽에서나 소년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대장에게 순순히 협력하면서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회는 소년들의 '맹목적인 복종'으로 유지되었으며 권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권력에 대한 '맹목성'이 사회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는 점은 새겨야 할 부분이다. 소년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소년들은 선출된 권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랠프가 제시한 섬에서의 탈출이 왜 중요한 목표가 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잭에게 고기를 실컷 먹고 즐긴 다음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질문이 결여된 사회에서 소년들은 삶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순간의 즐거움만을 탐닉하며 살아간다.

소설 <파리대왕>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거울처럼 비춘다. 한 달 후, 이 나라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당선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를 뽑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일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아닌 시민 한 명 한 명의 역할이라고 소설을 말하고 있다.

지도자가 가진 '권력 사용법'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롯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몫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소설 <파리대왕>에 나오는 실패를 반복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블러그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지은이), 유종호 (옮긴이), 민음사(2002)


태그:#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권력, #정치, #사회적 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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