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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보육원 이재경 음악치료사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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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안녕." 반가운 인사를 했다. 미소 가득한 그의 얼굴을 마주한 지적장애 아이들은 도미노처럼 울음보를 터뜨렸다. 당황하는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시설 선생님이 달려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그곳을 찾은 그는 말없이 기타로 동요 몇 곡을 연주했고 그제서야 아이들은 서서히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연주하는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뭔가 뜨거운 것이 목젖을 적셨다.

'내가 가진 음악적 재능이 다양한 효능들과 하모니가 되어 작은 변화를 주고 있구나'란 걸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서산시 성남보육원에서 음악치료를 하고 있는 이재경씨를 지난 5일 만났다.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며 부모님의 교육관이 있다면?
"먼저 부모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부모란 가족 안에서 지지 체계와 책임의 분담을 맡아 자녀들에게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일관된 교육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원동력을 줄 수 있는 존재다. 이는 흔히 아이가 "엄마", "아빠"라고 칭하는 두 사람의 힘이 합쳐져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에너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양육과 일을 병행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내게는 어머니의 가치관이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어머니는 환경적으로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 어머니 얘기를 더 해주면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일하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나와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셨다. 부모로서 책임감을 분담하지 못한다면 남겨진 사람이 최대한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퇴근 후 항상 책을 읽어주시거나 숙제를 도와주시곤 했다. 부득이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는 단순한 규칙을 알려주고 혼자 혹은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놀이와 과제들을 알려주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와 자주 하던 '오목놀이'다. 학령기 친구들에게 오목 두는 법을 알려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모여 구경하고 대결하며 몇 시간이고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모든 활동은 친구들과의 놀이문화로 번져나갔고, 덕분에 나는 또래 관계를 즐겁고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큰 도움이 되어 친구들과 관계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나아가 밝고 자신감 있는 지금의 내 성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결국 업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학창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유난히 나를 챙겨주시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빈혈이 심해 조퇴하거나, 아프다고 말하며 선생님께 자주 떼를 썼었다. 선생님은 이런 나를 귀찮게 여길 법도 했지만, 항상 차분한 어조로 나를 진정시키며 조용한 장소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하루는 빈혈로 인한 체기까지 겹쳐 4번이나 구역질을 하며 토를 한 적이 있었다. 토사물은 매번 옷을 더럽혔고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내 옷을 손으로 직접 빨아주시며 금방 나아질 거라고 안심시켜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 나이였지만 나를 위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선생님 품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그렇게 선생님은 1~3학년까지 내 담임을 맡아주셨고, 그 분의 보호 아래 병원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성년기에 접어들때 쯤,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혼자 빈소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영정사진으로나마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여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 음악치료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중 교수님의 소개로 보육원, 장애인 시설 등에서 음악 공연 봉사를 하게 됐다. 처음 지적장애 시설에 가게 됐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생 5명이 시설 작은 방 한 켠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이 아이들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이용하여 노래를 불러주고 같이 놀아주길 바랐었다.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먼저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도미노처럼 옆에 있던 아이들도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달려와 아이들을 달래주자, 모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일제히 "무섭다.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무척 당황스러웠고, 한편으론 상당히 무안했다. 그렇게 첫 번째 봉사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오게 되었다.

그때 근무하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지적장애를 앓고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셨다. 허무하게 집에 돌아와 '지적장애', '음악'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했고, '음악치료'기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음악치료 동영상을 시청한 뒤 나는 처참한 첫 봉사활동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먼저, 시설에 들어가 인사하지 않고 아이들과 거리를 조금 두고 기타를 꺼내 동요 몇 곡을 연주했다. 곡 선정은 사회복지사 선생님에게 미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어 어렵지 않았다.

5분여간 아이들은 내 옆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 본 음악치료에 대한 글 중에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포기하지 않고 혼자 계속해서 연주를 했다. 이후 5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이며 내가 연주하는 기타를 만져보거나 노래 제목을 크게 이야기하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노래를 불러주자 몇몇 아이들이 따라 불러주기까지 했다. 나는 즐겁게 봉사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를 이어갔다. 내가 가진 재능과 음악이란 에너지에서 나오는 다양한 효능들이 합쳐져 누군가의 마음과 행동에 작은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의 만족감과 동시에 '음악치료'라는 학문을 더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침 재학 중인 대학에서 '음악치료' 과정을 개설·운영 중이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등록했다. 공부하던 중 단순히 음악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음악치료뿐 아니라 모든 상담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활동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에서도 '심리치료'를 전공하며 다양한 임상경험을 했고 현재의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됐다."

- 음악치료사를 하면서 보람이 있다면?
"한번은 갓 성년이 된 20살의 청년을 부모님이 직접 데리고 온 적이 있다. 그 청년의 얼굴은 억지로 끌려온 듯했다. 더구나 자신이 왜 상담센터에 왔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은 자녀가 "방에 들어가 수년간 나오지 않고 자신들에게 왜 그러는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음악치료'를 의뢰한 이유를 묻자 방에서 가끔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상담센터에 데려가려고 알아보던 중 '음악치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청년과의 치료 세션은 단 세 번 만에 마무리됐다. 청년이 포기하거나 가족이 포기해서 일찍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첫 음악치료 시간에 청년은 부모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거라며 강한 불신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자신이 방에 있는 이유는 '래퍼'가 되기 위해서고, 그러기 위해 하루 종일 컴퓨터로 곡을 만들며 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청년에게 "래퍼는 랩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사로 쓰면 어때요?"라고 말했고 그는 생각보다 쉽게 순응했다. 두 번의 치료시간을 이용하여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사로 만들어 쓰도록 했다. 가사를 완성하고 청년이 있는 앞에서 부모님에게 가사지를 전달했고, 부모님은 "그런 꿈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며 청년에게 미안함을 전했고, 청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그 어떤 표현보다 진정성 있는 대답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심리적 고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고통을 아프다고 표현하며 얘기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 상담 경험은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큰 용기와 의지를 갖고 오는 만큼 치료사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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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육시설 개별 음악치료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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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5년간 음악치료를 했던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궁금증이 많았고 세션을 마치면 항상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음악치료사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 묻곤 했었다.
후에 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음악치료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연락을 해왔다. 내 기억에는 여전히 '아이'라는 존재로 남아있던 그 친구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자신과 같은 내담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이 직업을 참 잘 선택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 서산시에 바라는 점은?
"아동과 성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심리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개발해 주었으면 한다. 아이들은 대화로써 풀어가는 일반상담기법도 효과 있지만, 자기표현을 표출하는데에는 예술치료 분야가 훨씬 큰 도움이 된다.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놀이, 미술, 악기 배우기 등의 활동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방법들을 이용한 심리치료는 친근하고 부담감이 적어 치료 도구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장소와 인력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몇 배의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성인의 경우, 상담치료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물론 개선되고는 있다지만, 아직 심리치료란 용어는 다가가기엔 낯설다. 바우처제도가 활용되고 있다지만 주로 아동에게 국한되어 있다. 성인들은 지역사회에서 비밀보장 아래 보호받으며 치료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큰 비용이 수반되기도 하다.

서산시가 아동과 성인 모두 대면상담, 온라인상담, 예술치료 등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장소와 인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프라 플랫폼을 개발해 주길 바란다. 이는 많은 서산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앞으로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크게 두 가지 목표가 있다. 먼저, 음악치료를 통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대상자들의 치유를 도와줄 수 있는 센터를 서산에 설립하고 싶다. 최근 성인뿐 아니라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들까지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개인의 정서와 사회생활 혹은 대인관계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 제거는 내담자의 부정적 경험과 감정을 감소 혹은 제거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치료 기법이 필요하다. 자율성과 긍정적 작용들을 인지하는 치료과정을 거치면서 내담자 및 가족들은 비로소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후 여기에 음악치료 기법과 접목할 수 있는 운동 및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많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센터는 다가가기 어려운 감이 있다. 두통이 생기면 병원에 가고 쉽게 두통약을 사 먹을 수 있듯이 마음의 아픔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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