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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에서는 매년 아이들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든다. <영원한 친구>라는 제목으로 모아진 아이들의 글은 정리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글을 보던 부인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아이의 글은 느낌이나 감상이 적어."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느낌으로 표현하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런데 '10살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쓰기 싫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일을 정리하는 문장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놀았을 뿐인데, 지적받기가 싫어서 '재미있게 놀아서 친구와 사이가 좋아졌다'라고 끝을 맺었다.

진부한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거짓으로 썼고 더 큰 문제는 글쓰기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되어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읽고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 글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면서 쓰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과학을 통한 접근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느낌으로 표현하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런데 '10살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느낌으로 표현하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런데 "10살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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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한 조언은 근거가 명확해야 하지만 경험과 의견이 뒤섞여 상반된 주장이 대립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육아와 교육에 대한 주장을 들을 때 일정한 기준을 세웠다. 과학적 연구가 부족한 지식은 배제하는 것이다. 이 기준은 내가 가진 질문(초등학생 글에 느낌이나 감상을 적게 하는 것이 타당한가?)에도 적용된다.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읽은 책은 다음과 같다.

1. 바버라 스트로치, <십대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The Primal Teen>, 해나무, 2004.
2. 리즈 엘리엇, <우리 아이 머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What's going on in there?>, 궁리출판, 2004.
3. 매튜 코브, <뇌 과학의 모든 역사 The idea of the brain A History>, 심심, 2021.


많은 부모들이 알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생각은 뇌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뇌의 발달 과정을 알아야 한다. 위 책들을 통해 배운 지식은 다음과 같다.
 
1) 뇌는 기능상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를 국재화(localized)라고 한다.
2)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은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으로 구분된다.
3) 베르니케 영역(측두엽 특정 부위에 위치)은 어휘와 관련된 부분을, 브로카 영역(전두엽 특정 부위에 위치)은 문법적 기능과 관련된 일을 할 때 활성화된다.
4) 전두엽은 인지기능과 관련된 역할을 하는데 특히 전전두엽의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한다.
5) 청소년기 뇌는 전체적으로 재조직되는데 전두엽의 변화가 크고 여자아이의 경우 열한 살, 남자아이의 경우 열두 살 내외인 사춘기 때 정점을 이룬다.
 

위 지식을 종합해 볼 때 전두엽에 위치한 브로카 영역은 사춘기에 많은 발달이 진행되는데 10살인 우리 아이가 완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가 사건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인지적 기능이 많이 필요한 감상을 쓰기는 힘들다. 결론적으로 아이에게 감상을 말하거나 쓰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표현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교육을 통한 성장도 무시할 수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접근도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브로카보다 베르니케 영역 발달이 먼저 이루어진다고 밝혀진 것을 바탕으로 생각했을 때 단어나 어휘 교육은 가능하다. 아이들이 쓴 단어의 의미를 묻고, 비슷한 단어를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물이 자란다'라는 문장을 썼다면 식물의 의미를 물어보고, 자란다 대신에 '성장한다'라는 용어의 사용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외국어 교육도 단어 학습으로 접근할 수 있다. 'plant', 'grow' 등의 단어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드는 글쓰기 교육은 브로카 영역 발달이 이루어진 다음에 효과를 볼 수 있다. 단어를 늘려가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도 있다.

나무가 있다 - 은행나무가 있다 - 잎이 노래진 은행나무가 있다 - 차를 타고 가면서 옆을 보니 잎이 노래진 은행나무가 보였다 - 고모네 집에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옆을 보니 잎이 노래진 은행나무가 보였다 - 고모네 집에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옆을 보니 잎이 노래진 은행나무를 보니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거나 들은 장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을 표현하는 글쓰기 공부

다른 이유도 살펴봐야 한다. 뇌는 충분히 발달했지만 일부러 생각을 쓰지 않는 아이도 있다. 다른 사람(부모, 교사, 친구 등)에게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숨기고 싶은 내 마음과 알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 마음을 비교하면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감정을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은 어떤 감정이 있는지 모르니 즐거움, 재미, 감사, 용기, 사랑, 불만, 짜증, 질투, 두려움, 외로움 등의 예시를 주고 고르게 하면 쉽다. 주의할 것은 아이가 표현한 감정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같은 사안에 대해서 한 아이가 물을 때마다 다르게 표현해도 말이다. 감정의 변덕스러움은 청소년기 뇌가 재조직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10대 아이들에게 일관성을 요구하기보다는 솔직한 표현을 요구하는 게 맞다.

또는 글을 왜 써야 하는지 몰라서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방법보다는 철학의 문제로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이오덕 선생님은 '글짓기' 대신에 '글쓰기'를 강조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지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진실되게 삶을 표현해서 감동을 주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러한 글쓰기 철학을 갖는데 도움을 받은 나만의 귀한 책 목록이다.

1. 이오덕,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보리, 1998.
2. 이호철, <살아있는 글쓰기>, 보리, 2000.
3. 이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보리, 2004.
4.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그린비, 2006.
5.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2014.
6.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메멘토, 2015.


교사인 내가 현재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조차 글쓰기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나는 학년 초에 3시간을 들여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를 공부한다. 위의 책들을 참고하여 만든 수업 자료를 일부분을 소개한다.
 
글을 쓰면 삶이 즐거워져요

사람은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말을 글자로 적어 보이는 것이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사람이 자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는 글쓰기는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한 그대로, 느끼고 생각한 그대로,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것을 솔직하게 쓰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위안을 얻습니다. 정말 쓰고 싶어서 쓰는 글에서는 자신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은 보고 듣고 일한 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씁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길러 가고, 세상을 바로 알고 바르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밥을 먹는 행위와 같습니다. 먹고 싶어서,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쓰고 싶어서,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하기 위해 먹는다는 말은 표현을 위해 쓴다는 말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배는 결과적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고, 표현도 결과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삶이 막힐 때는 글로 뚫는 것이 가능합니다. 고민이 있을 때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을 꺼내야 살 수 있습니다.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는 글을 쓰면 됩니다. 글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불행한 상황이 뚝딱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한 줄 한 줄 풀어내면서 내 생각이 꼬이는 부분이 어디인지, 불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적어도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붙들고 씨름할수록 생각이 선명해지고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어서 즐거워집니다.

글을 쓰면 사람이 보입니다. 우선 내가 보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글을 통해 정리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이면 내 생각이 넓어집니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보면 쓴 사람이 드러납니다. 좋은 삶은 훌륭한 글을 만들고, 글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꾸며내지 않고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됩니다. 삶을 가꾸기 위해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과학적 접근을 통해 나의 질문을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과학 이론은 변할 수 있고 사람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내가 참고한 책에서 소개한 이론이 뒤집힐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연필이 공책에 닿을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를 좋아해 글쓰기를 즐기기도 한다. 인간은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존재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였습니다.


태그:#글쓰기교육, #초등학생, #육아, #대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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