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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초기의 동궁과 월지 모습을 찍은 사진.
 발굴 초기의 동궁과 월지 모습을 찍은 사진.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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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짐작하겠지만 고대의 왕은 현대의 통치자와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달랐다.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수상은 선거라는 제도를 거쳐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권력을 일정 기간 동안 행사하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의 성장이 가져온 결과다.

반면 고대의 왕들은 신(神)이나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대부분은 선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지는 방식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승계했다.

고대왕국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신라시대 왕들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왕이 되거나, 방계 혈족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

1300여 년 전 지금의 경주시 인왕동에 우뚝 솟아 그 미려함과 웅장함을 뽐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궁'은 왕의 아들, 즉 태자(太子·왕조시대의 차기 왕위 계승자)가 머물며 교육받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 권력의 바통을 손앞에 두고 있던 왕의 아들이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왕가의 관습과 제도를 익히고, 때로는 유유자적 산책을 즐겼을 동궁을 '나무위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원화로를 사이에 두고 북동쪽으로 매우 가까이 있으며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신라인의 생활상 알 수 있는 유물 쏟아진 곳

동궁과 그 일대 유적들은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에다 통일신라시대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당시의 건축 형태를 유추할만한 실마리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통상의 고대 유물들처럼 무덤에서 출토된 죽은 자를 위해 부장품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된 물건이 다수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고리, 빗과 가위, 목간, 물품 제조일자 꼬리표, 그릇 등의 신라시대 유물은 동궁과 월지에 유명세를 더해줬다.

동궁은 신라가 국력을 키워가며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해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에 축조된 것이라 이야기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라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거나, 힘이 약해졌을 때는 성을 만들어 낼 다수의 백성들과 건축 기술자를 동원해 이런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왕의 권력과 왕위를 이을 후계자의 권위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기에 만들어졌을 동궁. 그 막전막후의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행)을 살펴보자.

"문무왕은 679년 2월에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중수하였다. 8월에는 처음으로 동궁을 짓고 비로소 내외제문(內外諸門)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사천왕사를 완성하고 남한성을 증축하였다. 또 681년 6월에는 수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획하였다. (...중략) <삼국유사>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문무왕이 수도에 성곽을 쌓으려 하였다고 밝혀 나성을 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나성 축조에만 한정되지 않고, 중대왕실의 통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도성으로의 혁신을 시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외부의 침입을 막아줄 성을 쌓고, 불교를 중히 여기던 그 시절답게 나라가 관리하는 거대한 사찰을 세우고, 왕국의 중심도시를 새롭게 만들어가던 7세기 신라.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자의 거처이자 교육장인 동궁을 만들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왕이나 필부(匹夫) 모두 자신의 자식을 귀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확대한 해석일까? 이 질문에 답해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왕의 후계자가 머물던 곳은 월지궁? 동궁?

신라 35대 왕인 경덕왕은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상태에서 동궁을 보수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을 다시 인용한다.

"745년(경덕왕 4년) 동궁이 수리된다. 동궁이라는 곳은 왕실의 후계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아직 왕자가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동궁을 수리한다는 것 자체가 경덕왕의 후사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752년(경덕왕 11년) 8월에 동궁아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도 왕자는 출생하지 않았다. 사료 상에는 경덕왕에게 공주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으나, 동궁을 수리하거나 동궁아관을 설치했을 당시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아이가 머물 공간을 깔끔하게 리모델링 하고, 아들이 교육받고,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한 경덕왕.

경덕왕은 아버지가 아닌 형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은 왕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갈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경덕왕은 우여곡절 끝에 수리한 '동궁의 주인'이 될 아들을 낳았고 그가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다.

여러 명의 왕자들이 인품 훌륭한 학자에게 교육받던 공부방이자, 보디가드가 딸린 안전가옥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동궁.

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몇몇 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헷갈려하는데, 이 두 명칭에 대해서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월지는 월성 북편에 위치한 안압지의 원래 명칭이고, 이곳에 월지궁이 있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동지로 불리기도 했다. 헌덕왕대의 기록을 보면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한 사실과 이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을 때, 태자 혹은 동궁이라는 명문의 유물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보면 월지 주변에 태자궁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문무왕대에 대대적으로 월성을 중수하고 궁궐의 구조도 재편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월지궁이 동궁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지에는 연희를 위한 임해전이 있어 이 지역은 동궁으로 쓰인 동쪽과 연희를 위한 공간인 서쪽 임해전으로 이원적 궁궐 구조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설명처럼 사실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월지란 이름을 가진 것 외에도 '동궁'이란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상당수 나왔다.

이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왕족이 거처하는 월지궁은 동궁의 다른 명칭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아직도 발굴과 조사가 진행 중인 신라의 유적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아직도 발굴과 조사가 진행 중인 신라의 유적이다.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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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부침 겪은 신라의 동궁

동궁과 월지궁의 관계는 '통일신라의 궁원지, 동궁과 월지의 조사와 연구'에 실려 있는 이재환의 논문 '신라 동궁과 고대 동아시아 동궁 체계 비교 검토'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재환은 "월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월지와 월지궁, 태자, 동궁, 동궁관 간의 연결고리를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준다"며 "출토 유물과의 대응이 모호한 급장전을 제외하고, 동궁관으로 구분된 9개 관부 중 8개 관부에 각각 대응하는 유물들이 월지에서 모두 출토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자.

"이를 감안할 때 월지가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그 주변의 궁명은 월지궁으로 보이는데, 동궁관이 월지전과 월지악전을 관할 하에 두고 있으므로 월지궁이 곧 동궁이며, 동궁관의 다른 관부 관련 유물들도 월지에서 출토되었고, 태자와 동궁 관련 유물 또한 월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이 동궁은 왕위 계승 예정자의 동궁이기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동궁이라 불렸을 수도, 월지궁이라 불렸을 수도 있는 아득한 옛날 신라의 건축물. 권력의 승계가 구체적으로 준비되던 그곳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추측할 뿐이며, 조사와 발굴 작업을 토대로 동궁의 원형을 찾기 위한 현대인의 노력이 존재할 뿐.

신라가 역사 속에서 더 이상 힘을 뻗어나가지 못하고 사라진 후 동궁 역시 과거의 화려한 빛을 잃어갔다. <고려사> 등의 문헌에서도 이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학자들에 따르면 고려는 멸망한 신라 왕조의 흔적과 유물을 없애기 위해 동궁의 전각들을 무너뜨리고 허물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동궁이 있던 자리 일부를 동해남부선 철도 건설을 위해 훼손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 왕자들의 거처는 달콤한 꿈에서부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까지를 다양하게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의 부침은 인간만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동궁과 월지를 걷다보면 고대 왕국 태자들의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들리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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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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