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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촌마을에는 최부자집의 정신과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최부자 아카데미가 들어서 있다. 최창호 이사님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최부자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 경주최부자 아케데미 최창호 이사 경주 교촌마을에는 최부자집의 정신과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최부자 아카데미가 들어서 있다. 최창호 이사님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최부자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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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9일 오후 4시 42분]

천년고도 경주를 걷다 보면 수려한 모습을 지닌 전통마을을 볼 수 있다. 교촌 또는 교동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경주향교가 자리했고, 그 담장 너머에는 99칸 규모의 거대한 기와집이 바로 눈에 띈다.

최부자집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순히 그곳이 품고 있는 부(富)뿐만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지난 1월 27일, 현재 경주 최부자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최창호 이사님을 만나 함께 최부자집의 역사를 알아가 보았다.           
 
교촌마을은 첨성대, 대릉원, 계림이 몰려있는 동부사적지대에서 소나무 숲을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전통마을이다.
▲ 내물왕릉에서 교촌마을 쪽을 바라본 모습 교촌마을은 첨성대, 대릉원, 계림이 몰려있는 동부사적지대에서 소나무 숲을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전통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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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 고향이 울산이고,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경주를 종종 찾았는데요. 여기 교촌마을의 변화가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경주향교와 최부자집이 있는 이 마을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여기 교촌마을은 신라시대부터 역사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원효대사의 요석궁이 여기에 있었죠.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가 들어섰습니다. 원래 향교 주위에는 마을이 들어서지 않는데 최부자 7대이신 최언경이 이곳으로 터를 잡은 후 이곳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주향교는 신라시대의 교육기간인 국학이 들어선 이래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경주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 중심 전각인 대성전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 경주향교 대성전 전경 경주향교는 신라시대의 교육기간인 국학이 들어선 이래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경주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 중심 전각인 대성전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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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씨 가문을 이야기하면서 경주 최씨 정무공파의 시조 격인 최진립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고, 병자호란 당시 종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지금까지 전사한 두 노비의 공을 기려 제사까지 지낸다는 이야기가 저한테는 흥미로웠습니다.     
"
충노불망비라 해서 종가 옆에 충성스러운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바로 옥동과 기별이라 불리는 노비였죠. 현재도 우리 후손들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며칠 전에 정무공의 제사를 지내고 그 상을 들고 그대로 노비들에게 제사를 지냈죠. 정무공의 기록에 보면 임지에서 사사로운 것이라도 선물을 절대로 받지 않았다고 하죠. 추운 경흥에서 임기를 마치고 올 때 목도리를 선물로 받았지만 바로 거절하기 미안해서 방에서 들어가고 나올 때 걸어두고 나왔다고 합니다.

정무공의 아들 중에 2대 송정공 최동량이 있습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되었기에 개간 산업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간을 하면 국가에서 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수로를 만들었고, 시설을 적극 정비했습니다. 3대 최국선이라는 분이 이양법을 도입해서 수확량을 배 이상 확보해서 지금의 부가 확립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최진립장군 이래 최씨일가는 경주 내남에서 지금의 교촌마을로 집을 욺긴 후 지속적으로 부를 유지해 왔다.
▲ 최부자집의 사랑채 전경 조선 중기 최진립장군 이래 최씨일가는 경주 내남에서 지금의 교촌마을로 집을 욺긴 후 지속적으로 부를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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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최부자집과 관련한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집안의 재산은 1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라" 등입니다. 실제로 최부자 집에 내려오는 가훈인지 알고 싶습니다.     
"2대조이신 송정공 최동량 선생이 자손들을 훈계해서 만드신 가거십훈의 일부분입니다. 유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로 참고했고요. 그 밖에도 6훈이 있는데,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구전으로만 내려오고 있습니다.

땅이 커지다 보니 소작을 주게 되고, 소작인들이 많아집니다. 당시엔 수확량의 대부분을 지주가 가져가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쟁의가 일어나게 되죠. 나중에는 도적질을 일삼을 수밖에 없었죠. 어느 날 도적들이 최부자집에도 오게 되는데 그 중 최부자집의 소작인도 있었던 겁니다.

최부자는 이 광경을 보고 관청에 고발을 하지 않고 고리를 비롯한 소작인의 문서를 없애죠. 이후 5대 5 소작료를 절반으로 낮춥니다. 그러자 소작인들의 노동 의욕이 올라가 생산량이 두 배로 늘고, 오히려 최부자의 부는 증가하게 되었죠."      
 
최부자집은 다른 지주와 다르게 소작의 비율을 절반으로 지정해서 많은 소작인들의 근로의욕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생산량이 2배 이상 오르며 결과적으로 최부자집의 부가 늘어났다.
▲ 최부자집의 창고 최부자집은 다른 지주와 다르게 소작의 비율을 절반으로 지정해서 많은 소작인들의 근로의욕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생산량이 2배 이상 오르며 결과적으로 최부자집의 부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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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집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독립운동 관련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2대 최준 선생 대에 이르러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시고, 광복 후 교육활동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11대이신 최현식 선생님부터 봐야 합니다. 대한제국 시절 진사를 지내셨는데 나라가 기울던 시절 국채보상운동 등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사실 국채보상운동하면 대구가 유명한데 경주 지역이 다는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일찍이 아들이신 최준 선생에게 20대 초반부터 재산관리를 맡기고, 사실상 집안의 경영을 맡기죠.

나라를 뺏긴 경술국치 당시 최혜식 선생은 문을 닫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에도 참여했고요. 최준 선생의 동생이신 최완 선생은 대한광복회 재무부장을 지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박상진 선생도 사촌입니다. 박상진 선생이 한창 활동할 당시 자금을 여러 방면에서 융통했었고, 당시 최부자가 대구은행의 대주주였기에 대출 한도를 높일 때 보증도 서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많은 자금을 들고 최완 선생이 상해에 갔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예산의 3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였습니다. 나중에는 조선 최고 자본 회사인 백산무역 주식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자금들을 다방면에서 지원했습니다."      

- 최준 선생 이후 최부자집의 근황은 어떻게 되는 거죠?
"최준 선생이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다 보니 재산이 점점 줄기 시작합니다. 재산 대출을 일본은행에서 했는데 다행히 해방이 되어 재산의 30프로가 돌아옵니다. 최준 선생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합니다. 

경북대학기성회를 만들어 유지들이 참여했고, 많은 유지들이 모여 지금의 영남대를 설립했죠. 회장은 최부자였고, 학장, 이사장을 겸해 18년 동안 학교를 경영합니다. 그 밖에도 계림 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했으니 경주에 있는 집과 더불어 전 재산을 학교를 설립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삼성 이병철의 회장의 제안으로 운영권을 넘겼는데 1966년 삼성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집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서, 당시 대구대(현 영남대)가 권력자 박정희 측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현재 최부자집은 영남대가 소유하고 있고, 집안의 관리와 사용 등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부자집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 요즘 자체적으로 유튜브 채널도 개설하시고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도 관심이 워낙 크고, 경주시에도 적극 홍보하고 있지만 이제는 후손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집안이 가진 자료나 철학들이 현대사회에도 큰 교훈이 되고 있죠. 견학 온 아이들에게 물어보며 부자에 대한 인식이 나쁘더라고요. 그런 부자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흔히 최부자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격이라 하지만 사실 서양의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를 얻는 과정이 깨끗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최부자집은 스스로 개간했고, 이양법을 통해서 기술혁신을 했기 때문에 부를 쌓았습니다. 게다가 덕이 있었기에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지혜들을 현대 사회에서도 적극 알렸으면 해서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도 하고, 유튜브를 통해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헌 자료들과 유물을 알리고 싶습니다."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부자, 독립운동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로 알고 있던 최부자집의 이야기가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손에 잡힐 듯하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최부자집의 역사인 만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권,3권은 2022년 3월 출판 예정입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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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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