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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좌절이 꼭 필요한 경험이긴 하지만 꼭 그걸 지금,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맞나? 아이가 성별의 차이를 능력 차이로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인생에서 좌절이 꼭 필요한 경험이긴 하지만 꼭 그걸 지금,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맞나? 아이가 성별의 차이를 능력 차이로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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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이의 얼굴이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말 한 마디 건네기만 해도 금방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얼굴. 10년 넘게 봐온 얼굴이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옆에 와서 앉으면 뭐라고 첫 마디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아이의 동선이 바뀐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아이는 곧장 기둥 뒤로 가서 숨듯 선다. 그리고는 조용히 흐느낀다.

등만 봐도 알 수 있다. 생애 처음 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고, 좌절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위로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란다. 세상에,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기다리는 것이라니. 목구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을 애써 막는 나도 눈가가 뜨거워진다.

아이는 예상외로 집요했다. 갑자기 축구를 배우겠다고 하길래 조금 지나면 잦아들겠거니 했었다.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 적이 없었던 아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 반가운 마음이 앞서다가도 생각이 많아졌다. 당장 축구를 배울만한 곳이 거의 없으리라는 것과 앞으로 이걸 계속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뒤섞여 오만가지 추측을 불러냈다.

만약 선수로 활동하다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나중에 프로로 뛴다면 그 험한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운동선수는 은퇴도 빠르다는데 그 이후에는 어쩐다? 아이가 부탁한 적도 없는 10년 후 미래 걱정을 그 짧은 순간에 했었다. 단순히 취미로 축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선수가 되려는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예정된 수순이라는 생각에 혼자 앞서갔던 모양이다.

오만가지 걱정이 우선하게 된 이유에는 아이가 여자라는 부분도 포함돼 있었다. 평소 성별에 따라 할 수 있는 운동이 있고 없고를 따지면서 키운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편하게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가능하면 또래 여자아이들과 함께 배우기를 바랐지만 초등 고학년의 경우에는 남학생반만 운영하는 곳이 대다수였다. 서울시내에 고학년 여학생들로 구성된 팀이 없지는 않았지만 너무 멀리 있어 고려 대상에서 빠졌다. 그렇다면 아쉬운 대로 가까운 곳에서 남자아이들과 함께 배우는 수밖에.

처음 강습을 받는 날, 아이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수업에 함께 가달라고 했다. 당사자만큼 나 또한 긴장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수업장소에 가니 3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평범한 트레이닝을 입은 아이부터 손흥민의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아이까지. 입고 있는 옷도 신발도 다양했다. 모두가 남자라는 점만 빼면 그랬다. 예상했던 대로 축구를 배우는 여학생은 이 동네에 우리 애 하나였던 것이다.

당장 한숨이 나왔지만 태연한 척 인사를 하는 내 심정은 아이를 사지에 등 떠미는 것 같았다. 강사가 시키는 몇 가지 훈련을 할 때는 잠깐 평온한 마음이 되기도 했지만 20분 정도를 남기고 경기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또 다시 걱정이 밀려왔다.

주장 두 사람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팀원을 뽑아가는 식으로 팀을 나눴는데 예상했던 대로 딸애가 가장 나중에 뽑혔다. 경기가 시작되자 팀원 누구도 딸애에게 패스하지 않았고, 한참 어린 동생이 뭐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닦달했다. 나중에 물어 보니 "누나는 못 하니까 골대 앞에서 수비나 똑바로 해"라고 했단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굳이 안 찍어 먹어봐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되는 그런 것들. 아이가 축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걱정했던 상황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동안 나는 혼란스러웠다. 인생에서 좌절이 꼭 필요한 경험이긴 하지만 꼭 그걸 지금,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맞나? 아이가 성별의 차이를 능력 차이로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이것이 좌절의 경험으로 남을 것임을 알았다.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별로 없다는 것,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하는 데 분명히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아이가 기둥 뒤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후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뒤돌았을 때,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http://brunch.co.kr/@yoonyka)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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