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8 06:10최종 업데이트 22.02.08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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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는 신념의 공간이다. 같은 정치적 관점을 공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들이 모인다. 정당간의 상이한 가치관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열띤 토론과 격한 대립이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것이 수용되는 곳이다.

1월 31일, 영국 하원의 토론은 신념보다 신뢰를 우위에 두는 이례적인 광경을 보여줬다. 이 날은 코로나 봉쇄 기간 중인 2020년 다우닝가(총리 관저 및 주요 행정 부서가 위치한 거리)에서 벌어진 총리 포함 술 파티 등에 대한 보고서가 나온 날이었다. 보고서는 영국 내각부 (Cabinet Office) 소속으로 고위 공무원의 윤리 행동 감찰을 맡고 있는 수 그레이가 작성했다. 12쪽짜리 요약본에는 "지도력 실패"가 명시되어 있었다. 하원 토론은 보고서에만 집중했다. 보수당 대 노동당으로 갈라져 야유와 응원이 오고가는 평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 토론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바보(fool)"였다. 대중관, 예외주의, 도덕적 권위 등 대의 민주주의와 연관된 묵직한 주제가 이 단어를 중심으로 맴돌았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스캔들을 도덕적 기준보다는 법률적 위반 유무로 접근하며 자신의 정책적 유능함을 부각시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치명적 실수로 더 깊은 위기에 빠졌다. ( [관련기사] 코로나 와중에 40명 파티, 총리의 어설픈 변명 http://omn.kr/1wx0x )

대중은 바보인가  
   

영국 런던의 의회 광장 앞에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보리스 촌슨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며 "존슨 총리를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축출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크레시다 딕 런던경찰청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규정 위반과 관련해 지난 2020년 이후 총리실과 정부청사에서 벌어진 일련의 파티에 관해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존슨 총리는 코로나19 봉쇄 중이던 지난 2020년 총리실에서 술 파티를 벌인 사실이 최근 드러나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2022.1.26 ⓒ 연합뉴스

 
(다우닝가 파티) 노출 이후 (보리스 존슨의) 절박한 부정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선명하게 나오는 대신 단계 단계마다 대중의 지적 능력을 모욕했다. […] 영국 시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보리스 존슨의) 한마디도 믿지 않는다.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의 위 바보 발언은 대중은 어리석은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어리석은' 대중.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 식 표현에 따르면 대중의 "변덕스러움"이고, 평이한 표현으로는 "쉽게 잊어버리는" 대중, 보다 노골적인 표현으로는 "대중은 개돼지"가 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대중의 변덕·망각·무식에 대한 우려는 두 가지 형태로 발현되었다. 하나는 대중에 대한 불신으로, 이들에게는 합리적 그리고 최적의 판단을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선거권 획득 이전에 있었던 투표권 제한이 이를 반영한다.

20세기 전반기까지 투표권 제약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영국의 경우 재산이 적은 노동자 계층과 '집에 있어야 할' 여성들의 투표권은 제약됐고, 반대로 지식인에게는 특권이 주어졌다. 미국은 인종적 우매함을 우려했다. 노예제 폐지 이후 선거권이 주어졌지만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어 읽기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민족적' 우매함이 적용된 한국은 계층·성별·지식에 상관없이 해방까지 그 누구도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두 번째는 엘리트가 원하는 대로 대중을 휘두를 수 있다거나 여론의 향방을 조종할 수 있다는 21세기형 오만함이다. 존슨 총리는 파티 게이트 발생 이후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도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는 BBC 수신료 폐지안을 띄웠다. 러시아 푸틴 견제를 위해 NATO동맹국과 단결해야 한다며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자 했다. 친 존슨계 인사는 연일 계속되는 파티 게이트 뉴스에 대중이 피로를 느낀다며 이쯤에서 마무리하자고 했다.

환심 사기-외부로 관심 돌리기-피로감 강조로 가는 진부한 수순에 <옵저버(Observer)> 정치 논평가 앤드루 론슬리(Andrew Rawnsley)는 "대중을 바보 취급하는 것을 멈춰라"라고 논평했다.   

누가 바보인가
  

테레사 메이 전 영국 총리 ⓒ 연합뉴스

 
이날 테레사 메이 보수당 전 총리는 이를 누가 어리석은가로 확장시켰다. 브렉시트 투표 당시 카메론 총리와 함께 EU 잔류를 지지했던 그는 카메론 총리가 사임하면서 총리직에 올랐다. 취임 직후 1000파운드(약 150만원)짜리 가죽 바지를 사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거의 없다. 소프트 브렉시트를 추진했으나 보리스 존슨이 포함된 강경파에 밀려 사임했다.

총리에서 물러나면 보통 정계를 떠나지만 메이 전 총리는 평의원으로 계속 활동 중이다. 변한 게 있다면 그의 자리가 뒤 벤치라는 것. 영국은 총리였더라도 내각에서 물러나면 하원 내에서 어떤 예우도 받을 수 없다. 하원 내 최고의 특권, 즉 맨 앞줄 앉기는 철저히 현 내각 구성원에게 있다. 평의원 자격으로 세 번째 줄에 앉은 메이 전 총리는 "수 그레이 보고서는 다우닝 10번지가 규칙을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말은, (총리가) 규칙을 읽지 않은 것인가, 규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냐 이 중 하나다. 어느 쪽인가?"라고 물었다.

메이 전 총리 발언에서 '바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언어가 상대 의원을 향할 경우 모독 표현, 가령 바보, 거짓말쟁이, 주정뱅이, 쥐새끼, 배신자 등을 하원이 금지하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이 거짓말을 용어적 비정밀성으로 바꿔 표현했듯이 의원들은 에두르는 표현을 생각해내야 한다.

언어적 제약이 느껴지는 메이 전 총리의 발언은 존슨 총리에게 세 가지 유형의 바보 중 본인 스타일을 하나 고르라고 요구한다. 읽지 않았다면 게으른 유형이요,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유형이요, 자신을 예외라고 생각했다면 민주주의의 ABC인 "법 위에 아무도 없다"도 습득이 안 된 시대착오형이다.

어느 쪽이든 어리석은 사람은 영국 대중이 아닌 총리 본인이고 존슨 총리는 영국 사회가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출구를 찾지 못한 존슨 총리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답을 회피했다.

"총리는 내가 바보라 생각하는가?"

또 한 번의 "바보"는 보수당 평의원 애런 벨(Aaron Bell)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 의원은 봉쇄 기간 중 10명 인원 제한이 적용되는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시간 운전해 켄트까지 갔던 개인 경험을 꺼냈다. 그는 부모를 잃은 엄마를 안아주지도 못했고 형제들과 악수도 못했으며 할머니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차 한 잔 마시지도 못한 채 다시 운전해 돌아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다 끝낸 그는 "총리는 내가 바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법을 지킨 사람이 바보인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자리에서 평의원이 당대표이자 총리에게 던진 이 질문은 상대적이다. 부패 지수가 높은 사회에서 이것은 완연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다. 도덕과 원칙은 감상적이고 부차적인 가치요,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이상만 추구하는 언어로 취급된다. 대신 살벌한 권력 쟁탈식 언어가 지배하고 권력의 향방에 따라 움직인다.

반대로 부패 지수가 낮은 사회에서 위 질문은 놀라움, 분노, 부끄러움의 반의적 표현이다. 투명한 사회일수록 평의원과 당대표의 관계는 신념을 공유한 평등 관계이고 신뢰가 상하 관계를 성립시킨다. 수치스러움은 정책의 실패만큼이나 뼈아프다.  

국제 청렴도 조사 기관(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2021년도 발표에 따르면 영국은 11위다. (최상위는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등 북서유럽 사회가 주를 이루고 한국은 32위다.) 부패 지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의 속성상 "총리는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가"에 담긴 분노는 존슨 총리에게 깊은 상처다.

질타는 이어졌다. 보수당 앤드루 미첼(Andrew Mitchell)은 "나는 그동안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지지를 보냈다. […] 당신(존슨 총리)은 더 이상 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했고, 노동당 대표 스타머는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바보 같은 실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2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2021.11.2 ⓒ 연합뉴스/AP

 
2시간 내내 쏟아진 비판에 존슨 총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영국의 역대급 성학대범 지미 새빌(Jimmy Savile)이 살아생전에 기소되지 못한 것을 노동당 대표 스타머의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스타머는 2008-2013년 대략 한국의 검찰총장에 상응하는 직을(Director of Public Prosecutions) 맡아 잉글랜드-웨일스 검찰을 이끌었다. 2015년 정계로 진출, 차근히 경력을 쌓아 2020년 노동당 대표로 뽑혔다.  

지미 새빌(1926-2011)은 유명 방송인으로, 생전에 자선기금 모집 활동으로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달리 그는 백 명 이상의 여성과 아동을 상대로 수십 년에 걸쳐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의 행각은 2011년 사망 이후에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며 드러났다. 새빌의 과거 행적이 주목받으면서 그가 2009년 성폭행 혐의로 서리(Surrey)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검찰이 기소하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 스타머는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던 이유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결과는 당시 피해자들이 법정 증언을 할 준비가 되지 않는 등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스타머는 검찰의 오판을 인정,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스타머가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2020년, 극우 음모론 추종자들이 이를 각색, 새빌 사건의 책임이 스타머에게 있다는 거짓 정보를 소셜 미디어에 퍼뜨렸다. 그리고 보리스 존슨이 이를 하원에서 스타머에 대한 비판으로 이용한 것이다.

화살은 되돌아왔다. 2월 3일, 보리스 존슨과 14년간 일한 수석 정책 보좌관 무니라 미르자(Munira Mirza)가 사직했다. 스타머에 대한 부적절한 공격이 하원이 허용하고 또 장려하는 "찌르고 베기"식 토론 기준을 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는, "당신(보리스 존슨)은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다. 야당 대표에 대한 천박한 비난으로 스스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대단히 슬프다"라고 했다.

경찰 수사 결과가 분수령이 되겠지만 현재 존슨 총리의 정치적 위기는 깊어지고 있다. 무니라 미르자 사직 이후 네 명의 보좌관이 떠났다. 내각 제 2인자 리시 수낙(Rish Sunak) 역시 "솔직하게 말해서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보수당 평의원들의 공개 지지 철회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당 스타머 역시 보수당을 향해 "당신의 당은 윈스턴 처칠의 당이다. 우리들(보수당과 노동당)은 유럽 파시즘에 함께 맞섰다. 지금, 당신의 지도자는 싸구려 이득을 얻기 위해 파시스트들의 음모론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품위를 회복해야 할 때다"고 했다.

경제적 양극화·사회적 양극화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지금, 영국 민주주의는 위태롭지만 길까지 잃은 건 아닌 듯하다. 상반된 신념을 접고 잠시나마 기본 가치를 논할 여유가 남아 있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인지하고 견지하고자 하는 자정 능력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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