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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에 묻힌 진실을 발굴하다>
 평화기행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에 묻힌 진실을 발굴하다>
ⓒ 정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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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0일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이하 참세상)에서는 평화기행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에 묻힌 진실을 발굴하다>를 진행했다. 골령골은 한국전쟁 전후 3000~70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장소로, 그 매장지 길이가 1km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평화기행은 '임재근 박사 강연 – 대전 형무소 터 방문 – 유가족 간담회 – 산내 골령골 방문' 순서로 진행되었다. 당일치기로 떠난 짧은 일정, 그 속에서 참세상이 마주한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제주 4.3 항쟁부터 골령골 학살까지
 
임재근 연구소장 강연
 임재근 연구소장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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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무덤, 현충원과 산내 골령골이 있다. 왜 어떤 무덤은 존경과 애도의 상징으로 만들고 다른 한 무덤은 숨기기에 급급했을까. 분단을 정당화하고, 학살을 감추기 위한 역사 속에서 무덤마저 차별을 겪은 것은 아니었을까.

첫 일정은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장님의 강연이었다. 임재근 소장님은 골령골 학살의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소장님의 강연을 통해 우리 머릿속에 조각으로 자리하고 있던 한국전쟁 시기의 역사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고 골령골에서 학살된 사람들 중에 제주 4.3 항쟁 관련자, 여순 항쟁 관련자들이 있다. 남쪽의 단독 정부·단독 선거를 반대하던 사람들과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를 수 없던 사람들, 이들을 한국 전쟁이라는 빌미로 학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념이 다른 사람을 사회와 격리 시키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 학살한 것이다.

소장님의 강연을 통해 학살 당시 미군의 책임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골령골에서 학살이 일어날 때, 미군은 왜 옆에서 사진을 같이 찍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 중 하우스만 대위는 1981년도까지 대한민국에 머물면서 스스로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 그는 여순 항쟁과 관련하여 "재판이 시작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저에게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감시하도록 시켰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 제가 먼저 싸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주고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미지를 심던 미국이지만, 학살의 또 다른 책임자임을 알 수 있다.

강연을 들으며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의 진상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고, 민족의 통합을 바라는 사람들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대전 형무소 터와 산내 골령골을 만나다
 
대전 형무소 터
 대전 형무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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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을 마치고 대전 형무소 터로 이동했다. 대전 형무소 터에는 망루와 우물,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형무소라고 하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갇히는 곳이라고만 생각 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형무소는 독립투사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익 인사들을 정치범이라며 수용했다고 한다. 대전 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 제주 4.3 항쟁과 여순 항쟁 관련자들, 좌익 인사들이 갇혀있다가 1950년 골령골로 끌려가 그 생을 다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 형무소 터는 현재까지도 그 성격을 이어받아 반공 교육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의 일부를 방문했다. 현재 학살 현장은 유해 발굴 작업을 일부 마치고 흙으로 덮여 있다. 발굴 현장은 너무나 쓸쓸했다. 우리가 발굴 현장을 방문했을 때, 가느다란 줄 하나로 발굴지역 경계를 표시해 놓았을 뿐인 공터를 마주했다. 수십 년 감춰온 역사를 발굴이 이뤄지는 현재까지도 조용히 넘기려는 정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위령비에는 학살지 발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긴 돌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위령비에 남은 상처가 마지 유족들 마음의 상처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파왔다. 유족들이 가족의 뼛조각이나마 찾으려고 발굴 현장을 찾아와도, 겹겹이 쌓인 유해로 어느 것이 가족의 유골인지 알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부디 유해 발굴 작업이라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유족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유족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상처투성이 현대사
 
전미경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님
 전미경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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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형무소 터 방문을 마치고 유가족 대표이신 전미경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님을 만났다. 유족회장님의 아버지는 부역자로 낙인 찍혀 골령골에서 처형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 아픔, 이후에도 '빨갱이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던 삶. 유족회장님의 삶에 대해 들으며 정말 가슴이 아팠다. 처음 골령골에 대해 조사하면서 학살 희생자의 숫자를 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구나, 어떻게 이런 자국민 학살을 자행할 수 있을까?" 라며 그 수가 많다는 점을 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족회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최대 7000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희생자들의 유족들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단순히 숫자로 비극을 나타내기엔 너무 끔찍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기행을 간 우리들을 반겨주며 고마워하는 유족회장님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고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비극을 기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죄송스러웠다.

다시 서울로

골령골에 묻혀있던 진실을 마주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유족들이 수 십년 동안 한 줌씩 파낸 무덤 속에서 유골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유골을 마주한 세상은 조금씩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골령골은 단순히 발굴의 현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잔혹한 역사,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본 것 만으로도 이 싸움터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픈 이 역사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교사로서 끝없는 고민과 실천을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해본다.

덧붙이는 글 |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은 역사의 진실과 정의,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미래 세대에 가르치기 위해 함께 배우고, 함께 실천하는 교사, 예비 교사, 시민들의 모임입니다. 평화 기행 영상이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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