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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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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광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해외여행에서 귀국 중(공항에서) 체포하여 중앙정보부로 끌고갔다. 서울교구 소장신부 40여 명이 9일 명동성당에 모여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10일에는 서울ㆍ원주ㆍ인천ㆍ청주ㆍ수원ㆍ춘천 교구의 주교ㆍ신부ㆍ수도자ㆍ평신도 등 1,50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지 주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 도중 김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 후 지 주교는 풀려났으나 곧장 성모병원에 연금되었다. 연금상태에서 지 주교는 외신기자들에게 ① 부정부패 ② 1인독재 ③ 1인의 장기집권 ④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배포하고, 이로 인해 그에게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지 주교는 23일 중앙정보부로 연행되기 직전 성모병원 앞에 5백여 명이 모여 기도회를 가진 자리에서 내외신 기자와 교우들에게 준비한 〈양심선언〉을 공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양심선언'은 독재정권에 맞서는 시민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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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최소 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을 청원하거나 건의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다는 보도도 금지하며 대통령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의사조차 말못하게 하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그들이 본인이 범했다고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갖다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5. 본인을 재판하겠다고 하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는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없는 꼭두각시이다. 저들은 지금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데 있어서 비상군법회의라 불리는 형사절차의 이름을 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반면 통제된 신문들, 통제된 방송들, 통제된 텔레비전들에서는 소위 검찰관의 증거 없는 주장만이 사실로 나타난다.

                                                        1974년 7월 23일 아침
                                               천주교 원주 교구장 주교 지학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2차 시국선언문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2차 시국선언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2차 시국선언문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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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주교의 양심선언과 당국의 연행은 천주교에 활화산이 되어 타올랐다. 당장 같은 날 전주교구에서 지 주교와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특별미사, 7월 25일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단 공동주최로 명동성당의 기도회, 27일 인천교구, 30일 원주교구, 8월 2일 대구교구 등에서 각종 기도회가 열렸다.

명동성당과 각 교구의 기도회와 미사는 8월에 이어 9월까지 계속되고 독일에서도 재독 한인들의 주최로 열리고, 9월 22일에는 신ㆍ구교가 연합하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가톨릭문화관에서 개최되었다.

마침내 9월 24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기도회가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의 사제들은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였다. 사제들 외에 수도자ㆍ신자 등 1천 5백여 명이 참석한 이날 기도회는 지 주교의 석방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사제단 출정식이 원주에서 열린 것은 지 주교의 근무지인데다 1971년 10월 이곳에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반부패 시위가 전개된 이래 민주화의 각별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조선의열단ㆍ흑색공포단ㆍ다물단ㆍ철혈단ㆍ한인애국단 등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처럼 지하비밀조직이 아닌 공개된 천주교 사제들의 정의구현을 목표로 하는 '느슨한' 조직이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조직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 면을 내포하고 있다. 단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조직이 성립되기 마련이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또한 그 어느 단체보다도 조직적이다. 조직적이면서도 비조직적이고 비조직적이면서도 조직적인 기구가 바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비조직적이면서 조직적'인 특성으로 인해 반세기에 이르도록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천주교 사제는 1,200여 명(외국인 2백여 명 포함)이고 사목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신부는 9백여 명이었다. 그 중 3백여 명이 참여한 것이다.


주석
1> 김삼웅 편, <민족민주민중선언>, 180쪽, 일월서각, 1984.
2> 윤일웅,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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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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