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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어린이

나에겐 열 살 된 딸이 있다. 가끔 그녀를 '1인분'이라고 부른다(제 몫을 하는 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약간 콧소리를 넣어 "우리 1인부우우운!" 하고 길게 늘여 부르는 식이다. 그 말을 처음 쓴 건 2~3년 전쯤 한강 공원에 놀러 나갔을 때다. 아이는 남편이 텐트 치는 일을 돕고 있었다. 남편이 폴대 펴는 방법을 알려 준 모양인지 어느새 제법 능숙해져 있었다. 착, 착, 착, 착. 뭔가에 집중할 때면 버릇처럼 나오는 입술이 귀여웠다.

"어머! 우리 1인분, 멋지다."

이후에도 재미삼아 몇 번을 내뱉었다. 그런데 쓰는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일까. 재미로 뱉은 단어 하나가 생각에 작은 균열을 불러왔다. 어린이는 모자란 어른이 아니겠구나 하는.

이것이 내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게 된 이유다. 나는 어린이의 세계가 궁금했다. 이제는 완연히 어린이가 된 내 딸을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어린이를 안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1인분이니 뭐니 하며 아이를 존중하는 썩 괜찮은 어른이고 싶다가도, 들쑥날쑥한 현실 엄마의 노릇 앞에서 그 야무진 생각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엄마는 심리상담가나 선생님처럼 능숙하고 세련된 모양새와는 달랐다. ​내 딸을 '사회적 존재로서의 어린이'로 바라보지 않고, 내 수많은 감정이 드나드는 '내 (소유의) 아이'로 여겼다. 

그런데 책 <어린이라는 세계>엔 세심한 관찰력과 따뜻한 포용력을 가진 한 어른의 시선이 있었다. 내가 엄마란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 아이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어린이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얻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아주 큰 소득이다. 

숨바꼭질이 재밌는 이유

내 딸은 심심할 때면 나와 남편에게 숨바꼭질을 하자고 조른다. 차마 한 번에 거절할 수 없는 나는 숨바꼭질이 아직도 그렇게 재밌냐고 그녀에게 묻는다. 순수한 질문이 아니다. 열 살쯤 됐으면 숨바꼭질하자고 조를 나이는 지나갔다고 믿고 싶은 내 고지식함이 숨어 있다. 솔직히 숨바꼭질 같은 건 그만하고 싶은 귀찮음도 묻어 있다. 물론 아이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엄마와의 밀당에서 밀리면 안 되니까.

집에는 숨을 곳이 별로 많지 않은데 그녀는 왜 그렇게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답을 얻었다. 숨바꼭질은 숨을 곳이 많아야 재밌다. 그런데 몸이 작으면 숨을 곳이 많아진다. 어른이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구석에도 아이는 들어갈 수 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은 몸을 갖고 있다는 이 원초적인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건 애써 이해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생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제였다.

이건, 작은 교실에서도 감쪽같이 숨는 아이들을 보며 저자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엄마인 내가 내 아이와 놀아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저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관찰하며 숨바꼭질의 재미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냈다. 그 비밀은 단순하지만 나에겐 놀라운 통찰이었다. 내 딸은 몸이 작은 어린이였다. 그녀가 숨바꼭질하자고 조르는 걸 의아해할 이유가 사라졌다.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니 숨바꼭질을 하기 싫었던 내 마음도 진정되었다. 

어린이를 '존재'로 이해하는 일

어린이들이 장난을 치고 종종 사고를 일으키게 되는 건, 그들의 작은 몸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몸을 가진 그들은 공간을 어른과 다르게 인식한다. 우리가 어린이었을 때 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그 감각이 지금 우리 몸엔 남아 있지 않다. 우리 눈엔 그들이 일으킨 사고만 들어온다. 이렇게 우리는 어린이란 존재와 세계를 잊는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지켜야할 규칙을 가르치는 건 어른의 몫이다. 하지만 그들의 장난과 사고가 작은 몸과 관련되어 있음을 '아는' 건 또다른 인식의 문제다. 그건, 어린이를 어른에게서 무엇을 뺀 존재가 아니라 그들 자체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고유의 존재로 인정하는 일.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칠 수 있다. 노키즈존을 생각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그 자리에 배제 대신 포용을, 지시 대신 가르침을 택하는 어른의 자리를 세팅하면 된다. <어린이라는 세계>와 같은 책을 읽으며 어린이를 더 배우면 된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사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해주는 것에 익숙한 나머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 더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아이들은 같은 나이라도 생각과 감성이 천차만별로 발달하는데, 부모는 정해진 발달 계획표가 있는 양 나이와 학년에 딱딱 맞추어 학원엘 보낸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것 보다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내가 바라는 것을 아이가 수용한다고 해서 아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나 역시 뜨끔해진다.

'남의 집 이모'가 되는 일

얼마 전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 선생님과 통화를 하던 중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그녀가 2년 이상 지켜본 내 딸아이의 심성에 대해 요목조목 말해준 것이다. 어쩌다 보니 한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이 주제가 아니었다면 학원 선생님과 그런 장시간의 통화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에 대해 내가 엄마라서 모르는 부분이 있고, 누군가는 미술 선생님이라서, 독서교실 선생님(저자)이라서 아는 부분이 있다. 아니 되려 많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자꾸만 어린이 얘기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아이들을 사랑할 팔자를 타고난 모양이다. 그런 그녀가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p.181) 있는 '남의 집 이모'를 자처하니 고맙다. 한 마을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던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아이들과 책을 읽고 마음을 나누는 남의 집 이모의 소박한 꿈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남의 집 이모와 삼촌들에게서 내 아이에 대해 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도 가끔은 남의 집 아이의 마음이 보인다. 그래서 나도 '남의 집 이모'가 되고 싶다. 당신도 그런 어른이 되어주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어린이들에 대해 더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더 행복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 본인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https://blog.naver.com/fullcount99


태그:#어린이라는 세계, #어린이, #서평, #육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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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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