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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16방면군은 루손 섬에 상륙한 연합군을 상대로 필사적인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루손 섬 결전에 일본의 존망이 달려있다고 믿었고, 하루라도 더 연합군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겠다는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이에 따라, 야마시타 대장은 루손 섬 북부의 산악지대로 연합군을 유인하여 지연전을 펼치고자 했다(관련기사: 범죄로 얼룩진 '결전'... 교수형 전 대장의 자책).

중화기 투입이 곤란한 산악지대로 적을 유인하여 상대의 화력 우위를 반감시키겠다는 야마시타 대장의 구상은 합리적이었지만, 문제는 일본군 내부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통제하고 있던 일본 해군은 도시를 '사수'하겠다고 결의하고 야마시타 대장의 지연전에 합류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닐라에 모여있던 해군 병력의 대다수는,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함선이 격침되어 갈 곳을 잃은 패잔병들과 부상병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은 일단 마닐라에 머물다가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치료를 받거나 새로운 함선으로 재배치되어야 했지만, 제해권을 상실한 제국 일본은 이들을 본국으로 귀국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처치 곤란한 병력들을 차라리 마닐라 방어전에 투입해서 체면을 지키겠다는 것이 일본 해군의 발상이었다. '마닐라 해군 방위대'는 그렇게 편성되었다.

비극적 운명
 
마닐라, 더 나아가 필리핀을 미군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제국 일본의 전쟁 명분인 대동아 공영권을 선전하는 데 있어 좋은 소재였다. 일본에게나 미국에게나 마닐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도시였다.
▲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일본군의 마닐라 함락을 선전하는 전시 간행물 마닐라, 더 나아가 필리핀을 미군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제국 일본의 전쟁 명분인 대동아 공영권을 선전하는 데 있어 좋은 소재였다. 일본에게나 미국에게나 마닐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도시였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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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인 민간인 3천 명까지 긴급 소집하여 급조된 해군 방위대의 규모는 2만 4천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소집되어 군복을 입게 된 민간인들이나, 기본적으로 함상근무를 해왔던 해군 장병들을 데리고 지상전을 치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발상이었다. 지상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커녕 소총조차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이들의 비극적 운명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한편, 연합군 병력들과 함께 루손 섬에 발을 들인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루손 섬 북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 주력을 섬멸시키는 것 이상으로 마닐라 탈환에 적극적이었다. 지난날 일본군을 피해 필리핀에서 달아났던 치욕을 간직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에게 있어, 마닐라에 입성한다는 것은 전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문제였다. 맥아더 사령관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미군은 2월 3일 마닐라 공격을 개시한다.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축출된 바 있던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탈환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 마닐라로 진입하는 미군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축출된 바 있던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탈환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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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 능력이나 무장 상태로 미루어, 마닐라 해군 방위대는 결코 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사실상 맨손으로 맞서야 했던 일선의 장병들은 도저히 전선을 지켜낼 수가 없었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틈을 타 많은 장병들이 전선을 이탈해 야전병원을 찾거나 마닐라 탈출을 시도했다.

이 '도망병'들을 마주하게 된 마닐라 인근의 일본군 부대들은, '도망병은 사형'이라는 협박으로 이들을 마닐라로 되돌려 보냈다. 처음부터, 마닐라 해군 방위대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졌던 것이다. 마닐라 해군 방위대를 지휘하던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소장은 뒤늦게 '마닐라 시내에서의 후퇴'를 제16방면군 사령부에 타진했지만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마닐라 해군 방위대가 지닌 유일한 이점은 그들이 시가전의 방어 측에 서있다는 점이었다. 일본군은 도시 구획과 건물들 구석구석에 숨어 미군을 괴롭히며, 객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지속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닐라 시민들의 안전 문제였다.

무간지옥
 
"건물에 다수의 게릴라들이 잠입했으므로, 수차례에 걸쳐 필리핀인들의 퇴거를 권고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령관님은 게릴라를 한놈도 남기지 말고 전멸시키라고 우리 분대에 명령하셨다. 이에 건물을 폭파시키고 도망쳐 나오는 필리핀인들을 사살했다. 저항하지 않는 자, 부녀자와 아이가 다수였다."
▲ 마닐라 시민 학살을 목격한 니시오카 한이지(2004년 작고) "건물에 다수의 게릴라들이 잠입했으므로, 수차례에 걸쳐 필리핀인들의 퇴거를 권고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령관님은 게릴라를 한놈도 남기지 말고 전멸시키라고 우리 분대에 명령하셨다. 이에 건물을 폭파시키고 도망쳐 나오는 필리핀인들을 사살했다. 저항하지 않는 자, 부녀자와 아이가 다수였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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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과 도로 사이를 두고 치러지는 시가전은 야전과 달리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즉, 양측이 서로를 향해 마구 쏘아대는 총탄에 애꿎은 시민들이 맞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닐라는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였으니 피해는 더욱 확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처음에는 시민의 안전을 고려해 포격을 자제했던 미군이 일본군의 저항에 질려 전투 중반부터는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도시 곳곳에 가솔린을 흘려보내고 화염방사기 공격을 벌이며 마닐라를 완전히 태워버릴 듯 맹공을 퍼부었다. 시민들의 희생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필리핀 현지인들로 구성된 항일 게릴라가 마닐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닐라 공방전은 민간인 학살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일반 시민들과 같은 사복을 입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게릴라들의 출몰에 당황한 일본군은, 급기야 '소탕전'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시가전 상황에서 일본과 미국 양측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길을 찾아 방황하던 마닐라 시민들은, 이제 게릴라로 몰려 어떠한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학살될 위험까지 떠안아야 했다. 한때 '동양의 진주'로 불렸던 마닐라는, 무간지옥과 다름없는 아비규환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게릴라 소탕전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식량과 탄환을 소진한 채 고립된 장병들은 포격을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2월 12일, 마닐라 해군 방위대는 제16방면군 사령부로부터 뒤늦게 후퇴 명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앞서 제16방면군 사령부에 후퇴를 타진했던 이와부치 소장은 이 후퇴 명령에 대해 '탈출 불능'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마닐라의 일본군이 미군의 공세를 뚫고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이와부치 소장은 마닐라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휘하 병력들을 육탄 돌격시키며 절망적인 항전을 이어갔다. 그는 결국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전투 막바지에 자살했다.
▲ 마닐라 해군 방위대를 지휘한 이와부치 산지 소장 이와부치 소장은 마닐라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휘하 병력들을 육탄 돌격시키며 절망적인 항전을 이어갔다. 그는 결국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전투 막바지에 자살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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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승패는 누가 봐도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해군 방위대는 마닐라를 방어해낼 수도, 그렇다고 마닐라를 탈출할 수도 없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이때의 마닐라 해군 방위대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싱가포르의 영국군이나 필리핀의 미군은 굴욕을 무릅쓰고 일본군에 항복했지만, 이와부치 소장은 이들의 전례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항복하여 병력들의 목숨을 보전시키기보다, 다른 지역의 일본군 수비대가 그러했듯 명예롭게 '옥쇄'하기로 결심했다.

무의미한 전투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이와부치 소장은 마닐라의 각 부대에 키리코미(斬り込み), 즉 육탄공격을 명령했다.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일본군 병력들은, 일본도와 죽창 따위를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그들은 대부분 미군에게 닿기도 전에 기관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일본군의 육탄 돌격에 경악한 미군은 어느새부턴가 인기척만 느껴지면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았다고 한다. 탄약을 소진한 일본군과 달리, 탄약을 아낄 필요가 없었던 미군 장병들은 무지막지한 포화로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을 꺾었다.

2월 20일 미군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사지에 몰린 마닐라 해군 방위대를 향해 일본어로 투항 권고 방송을 실시했다. 죽음의 기로를 걸으며 극한의 상황에서 고통받던 일선의 장병들은 미군의 투항권고에 흔들렸지만, 그들의 지휘관인 이와구치 소장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공세는 재개되었고, 건물과 참호 사이로 숨어서 위태롭게 목숨을 이어가던 일본군 장병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마침표
 
"데리고 있던 신병들이 1명 빼고 전부 죽었습니다. 생각해보면, 17살 짜리 애들입니다. 얼마나 우수한 친구들이었는지... 17살짜리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다들 어린애들이었는데..."
▲ 마닐라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는 타카하시 젠지로(高橋善次)씨 "데리고 있던 신병들이 1명 빼고 전부 죽었습니다. 생각해보면, 17살 짜리 애들입니다. 얼마나 우수한 친구들이었는지... 17살짜리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다들 어린애들이었는데..."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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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마닐라 해군 방위대를 이끌던 이와부치 소장이 자살하고 3월 3일 미군이 마닐라 전투 종료를 선언하면서, 끔찍했던 마닐라 공방전은 비로소 역사의 페이지 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마닐라의 폐허 위에서는, 1만 6555구에 달하는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특히, 일본군의 최후 저항지에서는 팔이 뒤로 묶인 남성 시민들의 시신이 다수 발견되며,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학살 범죄의 민낯을 드러냈다.

한 달간의 전투로 10만여 명의 마닐라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애초에 이루어질 가망이 없던 '마닐라 사수'라는 구호는, 일본의 소년과 청년들, 무고한 필리핀 현지인들의 피로 마닐라를 적시고서야 멎게 된 것이다. 정작 마닐라 공방전이 일본의 패전을 늦추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떠올려본다면,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강요된 이들의 희생은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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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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