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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라디오 프로그램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사법논담'이라는 코너가 있다. 주로 그 주의 화제가 된 사법부의 결정을 두고 패널을 불러 토론을 하는 내용이다. 대체로 정치권 인사와 관계된 정경심 재판, 윤석열 장모 재판, 김건희 수사, 대장동 수사 같은 소재들을 다룬다.

신기한 것은 각 재판이나 수사·기소에 대한 의견이 각 패널의 정치성향에 따라 칼같이 갈린다는 점이다. 김건희씨가 주가조작으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보는 패널은 거의 반드시 정경심 재판에서 동양대 PC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으며, 김학의 수사의 절차적 흠결을 문제 삼는 건 부당하고, 대장동 수사의 방향이 이재명을 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 거울쌍을 이룬다.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아무리 '빼박캔트'인 결정인 경우라도 정파적으로 불리한 판단이라면 반드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서 판단에 흠집을 낸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법리를 동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개의 독립적 정치적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각각 백중세로 갈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두 법조인의 긍·부정 평가가 '우연히' 각 정파의 이해와 모조리 들어맞을 수학적 확률은 대략 1조 분의 1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정치적 입장을 제외하고서는 저 '정파적 법조인'들의 견해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양 진영의 패널들은 사안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법리를 동원해서 근거들을 짜맞춰 논리를 제공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법조인들의 견해를 왜 국민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어야 하는가? 진영논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법리적 판단이 판결과 수사를 대중이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

만약 사법당국의 어떤 판단이 정당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평가나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라면 이런 평가방식은 유의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재벌범죄에 대해 보수는 다소 온정적이겠지만 진보는 엄단을 요구할 것이다. 노동, 환경, 젠더 등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정당의 이념에 따라 상이할 수 있고 이들의 차이를 조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의 장모 비리, 정경심씨의 표창장 위조, 김건희씨의 주가조작 의혹 따위가 정파에 따라 사법적 해석이 달라질 이유는 하등 없다. 정파적 유불리와 상관없이 냉정하게 법률적 쟁점을 일별하고 평가할 전문가가 없지 않을 텐데, 굳이 정파적 법조인의 견해를 언론이 나서서 과잉대표하게 만들 이유가 있는가?

사법의 정치화에 동조하고 있는 언론

언론이 중요한 사법적 판단을 각 정파들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파악하고 정치적 득실을 따져보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법적 판단에 대한 논평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문제다. 동양대 PC의 증거능력을 논하는 데 정치는 필요 없다. 이념논쟁의 가치가 없는 사법판단에까지도 정치구도를 대입시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언론은 늘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하지만, 막상 언론 역시 사법의 정치화에 동조하고 있는 건 언론 자신이 성찰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김종배의 시선집중>을 예로 들었지만, 여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진행자가 나름의 기준을 갖고 양쪽의 판단을 따져 묻는 성의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편채널의 각종 토론프로그램들이나 정파적 유튜브들은 그런 성의조차 없이 사법판단의 해석에 일률적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와 구도를 개입시키거나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소개한다. 언론 자신의 보도나 입장조차도 여기에 매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태도는 정치의 양극화와 근거 없는 음모론을 강화시킨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끊임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에게 불리한 판단을 한다는 생각을 누적시키고, 정치와 사법부가 긴밀히 결탁해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보수는 보수 나름대로 정권을 쥔 여당이 사법부를 입맛대로 컨트롤한다고 믿는다. 진보는 진보 나름대로 개혁에 저항하는 사법부가 보수정치와 결탁했다고 본다. 정파적 법조인들의 해석은 계속 양 진영에 증거를 제공해 주고 언론은 판을 깔고 수수료를 챙긴다.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극단적 분노와 공포, 불신과 반과학적 태도뿐이다.

언론이 사법적 과정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그 과정의 사회적 의미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게 신중히 선택되어야 한다. 일률적으로 모든 사안에 정파적 법조인을 불러놓고 싸움을 시키는 나태한 방식은 이제 청산하자. 축구 해설도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불러올 생각인가.

태그:#사법부,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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