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8 20:10최종 업데이트 22.01.2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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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 pixabay

 
19세기 이전까지 커피를 마시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커피는 주전자에 물과 함께 커피 가루를 넣고 20~25분 정도 끓이는 단순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300년 이상 그런 방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 찌꺼기가 주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조심해서 따라 마셔야 했다.

커피 가루가 바닥에 잘 가라앉게 하려는 노력이 어어졌고, 발견한 것이 계란 노른자나 물고기 부레로 만든 풀(isinglass)이었다. 이것들을 함께 넣고 끓이면 찌꺼기가 잘 가라앉아 먹기 편한 커피가 만들어졌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도 유행했던 방식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룬 커피 혁명

이런 전통적 방식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주전자에 커피 가루와 물을 넣고 마구 끓여서 마시던 오래된 커피 문화에 도전을 시도한 것은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었다. 마시는 커피에 섞여서 입을 불편하게 하는 커피 찌꺼기를 여과시키는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보적 형태의 커피 드립 기계인 퍼컬레이터(percolator)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커피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최고령자 장 밥티스트 드 벨루아(Jean Baptiste de Belloy) 대주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드 벨루아는 1709년 프랑스의 파리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모항글르(Morangles)에서 태어났다. 1737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751년에 그랑데브(Glandéves)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790년에 고향 근처의 작은 마을 샹블리(Chambly)로 물러나서 1801년까지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벨루아 주교가 커피 역사에 남을 발명을 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의 나이 91세였던 1800년 그가 발명한 것은 커피를 내려 마시는 드립포트였다. 주전자 상부에 커피가루를 담는 거름망을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하부에 물을 담은 주전자를 끓임으로써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를 적시는 방식이었다.

91세의 나이, 주교라는 지위에 있던 드 벨루아는 이렇게 커피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이것이 이후 퍼컬레이터를 거쳐 커피메이커로 진화하였다. 물론 1세기 이후에 종이 필터를 이용한 커피 드립 방식이 탄생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멋진 이야기이다. 1802년부터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그는 1808년에 백작 작위를 받은 직후 사망하였고, 유명한 노트르담 사원에 묻혔다. 지금도 노트르담 사원의 수많은 성인 무덤 중 가장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그의 무덤이다.

드 벨루아 이후 1806년부터 1855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만 무려 178건의 커피메이커 특허가 출원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시작된 해인 1806년에 파리에 살던 양철공 아드홋(Hadrot)이 드 벨루아의 커피포트를 개량한 제품을 출원하였다. 주석이나 가벼운 금속류를 이용해 생활 도구를 만들고 수리하는 이들이 양철공들이었다.

아드홋이 만든 포트는 기존 거름망에 사용하던 양철판을 강화 주석으로 대체해서 부식을 막는 방식을 사용했다. 양철공이 갖고 있던 경험에서 나온 작은 지식을 활용해서 이룬 업적이었다. 내려진 커피의 열을 보존하기 위해 커피포트의 외부를 두 겹으로 만드는 혁신도 신선하였다. 혁신에는 학력도 직업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륙 봉쇄령으로 커피 원두 구입이 어려웠던 10년 동안은 커피 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대륙 봉쇄령이 해제되자 다시 커피포트 개발 붐이 시작되었다. 1815년에는 물을 끓이지 않고 커피를 내리는 새로운 방식의 이른바 세네커피메이커(Sené-coffeemaker)가 발명되었다. 드 벨루아 포트의 개량 제품이었다. 역시 파리에 살던 양철공 장 세네(Jean-Baptiste-Louis-Marie SENÉ)의 작품이었다.

장 세네에 이어 장 모리즈(Jean-Louis MORIZE)라는 인물이 좀 더 단순화된 제품을 내놓은 것이 1819년이었다. 그 또한 양철공이면서 램프 제작자였다. 그가 만든 커피메이커는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일명 나폴리탄 커피메이커(Napolitan coffeemaker)로 전승되어 사용되고 있다.

끓은 물이 만든 스팀 압력을 이용하여 작은 관을 타고 물이 포트의 상층부로 올라가도록 하고, 이 물이 커피 가루를 통과하여 떨어지는 순환 방식의 커피포트를 발명하여 현대적 커피포트의 출발을 알린 것은 조셉-앙리-마리 로랑(Joseph-Henry-Marie LAURENS)이었다. 1819년이었다. 로랑 역시 양철공이었다. 커피 역사에서 그야말로 양철공 전성시대였다.
 

커피 포트 ⓒ pixabay

 
커피를 보다 부드럽고 편하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대륙 봉쇄령 이후, 특히 전쟁과 혁명, 왕정복고 등의 격변이 마무리되고 시민들이 일상적 소소함을 즐기기 시작한 비더마이어 시대(1815-1848)에 접어들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커피 대중화와 함께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도 커피메이커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이런 움직임을 이끈 것은 유명한 과학자도 천재도 아니었다. 양철공과 같은 노동자들이었다.

유럽에 비해 산업화와 커피 대중화가 늦었던 미국에서는 1865년에 매사추세츠 주에 살던 제임스 네이슨(James H. Nason)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미국식 커피포트인 퍼컬레이터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스팀의 압력을 이용한 방식이 아니라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이었다. 그의 직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에서 완성도 높은 퍼컬레이터가 등장한 것은 1889년이었다. 일리노이주의 농부였던 한슨 굿리치(Hanson Goodrich)가 요즘 커피메이커와 거의 같은 방식, 즉 스토브 열을 이용하여 용기 하단을 가열하면 용기 중간에 있는 튜브를 타고 물이 올라가서 중간에 설치된 거름망 속의 커피 가루를 적시는 방식이었다. 프랑스 양철공 조셉 로랑의 커피포트와 같은 원리를 이용하였다. 굿리치는 평범한 농부였다.

드디어 1908년 지금 우리가 즐기는 종이 필터를 이용한 드립 방식이 등장하였다. 독일의 평범한 주부 멜리타 벤츠(Melitta Bentz)의 발명품이 그 원조이다. 그 이전까지는 터키식으로 커피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끓이든지, 커피포트를 사용하여 내리든지, 아니면 천 종류인 융(Flannel)을 여과 도구로 사용하여 거르는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었다.

벤츠는 이런 불편한 방식을 개선하여 커피의 역사를 바꾸었는데, 그녀가 처음 사용한 필터는 아들이 사용하던 노트를 찢어서 만든 필터였다. 이 종이 필터를 받치는 드립퍼가 초기에는 어떤 소재였고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벤츠의 종이 여과지를 이용한 드립 방식은 일본 커피인들을 통해 대중화되었다.

이처럼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커피 제조 기술은 과학자의 명석한 두뇌나 대형 기업이 가진 자본의 힘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90대의 주교, 평범한 양철공, 농부, 그리고 가정 주부의 생활 속 경험과 생활상의 필요가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역사이다.

갑과 을이 분명치 않던 아름다운 시대

19세기 커피의 역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커피의 대중화와 소비의 폭증으로 인해 '제국의 시대'에 커피 생산에서는 식민주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대단한 기술력이나 공장이 필요 없는 커피 생산 과정의 특징으로 인해 19세기 후반까지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향력이 커피 생산에는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커피는 노동자와 농민들도 마시는 대중적 음료로 의미가 확대되었고, 브라질의 등장으로 커피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소비의 증가가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왔고, 생산량의 증가는 가격을 안정시켰다. 안정된 가격으로 커피 소비 인구와 소비량은 다시 늘어났다. 이런 거대한 선순환 과정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적 야욕이 끼어들기 어려웠다.

철도망의 개설과 기선의 등장으로 커피 수송 비용이 낮아진 것도 이러한 선순환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맞아 돌아가는 커피의 생산과 거래 과정에 강대국이 관여할 여지가 크지 않았다. 가공 과정에 기계와 자본이 필요했던 설탕 산업 등과는 달랐다.

독일인들이 과테말라 커피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왔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브라질 커피농장으로 향했다. 커피 생산의 세계에 갑과 을이 명료하지 않은 비교적 아름다운 시대, 커피 생산지에 소소한 행복이 넘치던 시대였다. 거대 자본과 결합을 시작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이 좋아하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2021.
Pootoogoo. Elevator to Espresso(Episode 3). The Black Blob Spot. 2015. 3.5. 2022. 1. 27. 00:05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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