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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엄마하고 책 읽고 토론해볼래?"
"싫은데."

"한 권당 만 원 줄게."
"싫어."

"그림책이야."
"좋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딸은 이번주 내내 인상을 쓰고 있어서 덩달아 나도 녀석의 눈치를 봐야 했다. 어제는 장을 본 게 많아서 딸한테 주차장에 내려오라고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았다. 딸은 노래방이든 어디든 전화만큼은 잘 받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짐을 이고 지고 집에 와서 녀석을 불렀더니 자다 깬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났다. "어제 몇 시에 잤냐?"고 하니까 '새벽 두 시'라고 했고 그때는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나는 무슨 말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막고 늦잠으로 입맛을 잃은 딸을 위해 사온 김밥과 쫄면을 차려줬다.

하지만 오후 5시에 문을 열어봤더니 녀석은 또 자고 있었다. 오전과 낮시간에 잠을 자는 녀석 때문에 한 집에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휴지나 수건이 없을 때(그러니까 응당 불러야 할 일이 있을 때), 이 집에 나 말고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를 느낄 뿐이었다.

공부는 하기 싫고, 핸드폰은 자꾸 보게 되고
 
보아하니 딸은 밤새 휴대폰을 하고 그 외 시간은 잠만 자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딸은 밤새 휴대폰을 하고 그 외 시간은 잠만 자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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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오랜만에 마주 앉은 딸이 말했다.

"나는 엄마처럼 공부 못 할 것 같아."
"엄마 별로 잘한 거 아닌데?"

"아냐. 나는 엄마 정도도 못할 거야."
"아빠도 중고등학교 때는 공무 못했대. 그리고 네가 엄마 어릴 때보다 똑똑해. 그건 장담할 수 있어."

"나도 엄마 때처럼 휴대폰이 없었다면 공부했을 것 같아."     


보아하니 딸은 밤새 휴대폰을 하고 그 외 시간은 잠만 자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휴대폰이나 게임 중독이 되면 점점 무기력해지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나의 욕망에만 몰두하는 엄마지만, 녀석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했다. 방학인데 아빠한테 용돈을 7만 원밖에(!) 못 받았다며 불만인 딸에게 돈을 미끼로 독서 토론을 하자고 한 이유다.

우리 아빠 김길수씨는 방학이 되면 오빠와 나에게 계획표를 짜오라고 했다. 계획표에는 운동과 학원을 한 가지씩 넣으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필요한 걸 해주는 게 아빠가 돈을 버는 이유"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등록해준 에어로빅(그때는 운동이라면 이것밖에 없었다)을 아줌마와 아가씨들 사이에서 하고 영수학원을 다녔다.

두 가지 모두 결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매일 숙제와 에어로빅복을 꼬박꼬박 챙겼다. 아빠나 나나 꽤나 성실했던 시간이었다. 같은 시간 오빠도 무협지와 게임이라는 광활한 세계에서 무림고수가 되기 위해 홀로 고독한 싸움을 했다.
    
"엄마, 책 안 줘?"

이 소리가 "엄마, 돈 안 줘?" 들리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아빠 말에 복종했던 나와 엄마 말이라면 토부터 달고 보는 딸을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방학하고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주는 딸한테 고마워하기로만 했다.

중학생 딸과의 티키타카... 이 시간이 좋다
 
토론하려고 (나만) 마음먹은 책. 딸을 위해(?) 그림책을 구입했다.
 토론하려고 (나만) 마음먹은 책. 딸을 위해(?) 그림책을 구입했다.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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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면, 나는 딸이 말대꾸를 하면 '얼쑤 잘한다' 추임새를 넣고 싶은,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 되고 만다. 예전에 내가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을 못 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일방적으로 훈계를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화가 잘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중 2를 앞두고 있는 딸은 질풍노도의 수치가 하루가 다르게 상승해서 말에 논리라는 게 없었다. 나는 딸의 말에 대응하는 걸 포기하고 탄식을 할 때가 많은데 녀석은 이 어미가 얼마나 참는지도 모르고 그것조차 듣기 싫은지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는 한다.
    
어떨 때는 녀석이 일부러 화를 내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내가 식탁 정리하면서 "컵은 바로 씻고 엎어놔야 내 복을 다 챙기는 기다" 하면서 할머니 흉내를 내고 있는데 딸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말하는 중인데 어디 가냐?"
"추워서 방에 들어가서 들으려고."

"엄마하고 한 공간에 있기 싫어서 그러지?"
"문 열어 놓으려고 했어."

"아니야, 엄마와 최대한 떨어져 있고 싶은 무의식이 작용한 거야. 엄마는 작가라서 다 알아."
"엄마 글 쓴다고, 책 많이 읽는다고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마. 엄마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그럴 때마다 엄마 진짜 싫어."


싫다는 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낼 상황도 아닌데 몰래카메라 찍는 것도 아니고 냅다 화를 내서다.

"방에 빨리 가고 싶어서 일부러 화내는 거지?"
"아니라니까. 엄마 진짜 짜증 나."


한 장 남은 치즈를 저한테만 넣어서 샌드위치 만들어줬더니 오전 9시도 안 됐는데 "싫어, 짜증 나" 2종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한 마디. "작가도 아니면서." 그 말에 우리 둘 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말 취소해. 책을 냈는데 왜 작가 지망생이야. 빨리 취소해."

억울하지만 웃긴 건 웃긴 거였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오면, 책을 찾아보니 그림책이 마땅한 게 없었다. 그때 <십시일반>이 눈에 띄었다.
    
"뭐야? 엄청 두껍잖아."
"만화니까 앞에 조금 읽고 결정해."
"싫어. 계약위반이야."


계약위반은 너다 이놈아. 잠 와 죽겠는데 책 읽어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조금이라도 더 읽으면 큰 손해라도 나는 것처럼 구는 네가 계약위반이다 이놈아. 하지만 다음 날 보니 초밥이는 <십시일반>을 읽고 있었다.

"읽을 만해?"
"어."


'돈 벌려면 할 수 없잖아'로 들리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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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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