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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10.19 평화공원 안 평화의 탑 조약돌에 적힌 글귀들. '한반도의 해원은 여순사건 (진상규명으로부터)'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여순 10.19 평화공원 안 평화의 탑 조약돌에 적힌 글귀들. "한반도의 해원은 여순사건 (진상규명으로부터)"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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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부모님이 그때 희생당했다고 밝혀지면, 주위에서 대놓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할 텐데, 이제 와 무슨 덕을 보자고 나서겠어. 70여 년 동안 맺힌 한 이미 가슴에 묻었어. 손자들은커녕 자식들에게도 쉬쉬해 온 마당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잖아." 

그는 아서라며 도중에 말을 끊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여순사건 당시 순천 집을 나가 지금껏 생사를 알 수 없는 분이 계셔서 직계 유족에게 부러 신고를 종용하던 차였다. 되레 진상이 밝혀지고 주위에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거다. 

지난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아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지난 1월 21일부터 전라남도청과 여수, 순천 각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여순사건 피해자의 신고 접수가 시작되었다. 신고 기간은 2023년 1월 20일까지다. 

특별법이 제정되어 물꼬는 튼 셈이지만, 무려 74년의 세월 동안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 맺힌 응어리가 쉬이 풀릴 것 같진 않다. 일단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까닭이다. 피해 당사자 중 생존자가 극소수인데다 당시의 상황을 신빙성 있게 증언할 수 있는 유족들조차 많지 않다.

무엇보다 빨갱이라는 낙인에 대한 공포가 여전하다. 사실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이들 대부분은 좌우익 활동과 직접적 관련성이 없는 민간인들이다. 제14연대 봉기군이 토벌대에 의해 진압된 뒤, 이른바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 아래 숱한 시민들이 끌려 나와 즉결 처형당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한 후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국가는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감추기 위해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이다. 부모와 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말했다간 그 역시 빨갱이로 내몰려 고초를 겪었다.

여순사건 때도, 직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제주에서도, 나아가 이듬해 6.25 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 때도 국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어김없이 '빨갱이 사냥'으로 규정됐다. 낙인의 공포 속에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시신이 엉켜 누구의 유해인지 알 수 없어 한 형제, 한 자손으로 이름 붙인 여수의 '형제묘'와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묘비와 위령비 하나를 세우는 데도 유족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위령비 뒷면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 줄임표 점 여섯 개만 새겨놓은 이유다. 세워진 때가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 가까이 지난 2006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거다. 

더는 설득할 수 없었다
 
만성리 형제묘 전경. 오른쪽은 이곳에서 학살당한 오빠를 잊지 못해 죽어서 함께 묻히고자 했던 여동생의 묘소 앞 비석이고, 뒤편 왼쪽에 세워진 것이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유족이 비문 내용을 덧씌워 가려버린 묘비다.
 만성리 형제묘 전경. 오른쪽은 이곳에서 학살당한 오빠를 잊지 못해 죽어서 함께 묻히고자 했던 여동생의 묘소 앞 비석이고, 뒤편 왼쪽에 세워진 것이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유족이 비문 내용을 덧씌워 가려버린 묘비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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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묘에 세워진 묘비의 사연은 더욱 애달프다. 비문이 무고하게 학살된 이들을 빨갱이로 낙인찍는 내용이라며 한 유족이 비석을 덧씌워 가려 버렸다. 이곳에 묻히고 불태워진 125명의 시신이 마치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양 '군사재판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던 거다.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는 눈물겨운 이야기 하나가 전해온다. 그곳은 당시 부역자로 지목돼 끌려와 학살당한 뒤 수많은 시신이 암매장된 구덩이였다. 이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구덩이를 향해 작은 돌멩이를 던졌고, 후손들도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를 던지는 건, 일종의 원혼을 달래려는 행위였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야만의 시대에 이웃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그 울분을 표현하고 기억을 전승하려 했던 거다. 지금 위령비 앞에 놓인 수많은 돌멩이는 그것에 대한 후손들의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신고를 한사코 꺼린 유족은 연좌제를 두려워했다. 당신 자녀와 손자의 취업 등에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모습에 적이 난감했다. 1980년 헌법 개정으로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뇌리에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남아 있는 듯했다.

시대가 변했다고 강변했지만,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 않으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다짜고짜 빨갱이를 혐오하는 마당에 자칫 혹을 떼려다 없던 혹을 붙이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분단으로 켜켜이 쌓인 편견은 법만으로 단박에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피해자임을 스스로 드러내 명예를 회복시키는 특별법의 한계를 지적한 셈이다. 곧, 빨갱이 낙인에 평생을 시달린 유족의 입에서조차 '반란'이라는 옛 명칭이 튀어나오는 우리 사회의 편향적인 역사관이 우선 개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통일이 이뤄지거나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야 비로소 빨갱이라는 말이 사라질지 모르겠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피해자 신고를 '긁어 부스럼'으로 여기는 건, 그가 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경험의 소산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사건의 기념물을 세웠다가 부수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기 때문이다. 최후의 승자는 늘 반공을 앞세운 우익세력이었고, 한 번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은 그때마다 동네북이 되어 치도곤당했다.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빨갱이와 좌파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어가 됐고, 하다못해 왼손잡이라는 말조차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좌파는 반국가세력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강고하다. 게다가 '종북'이라는 수식어까지 덧붙여진 신세다.

어언 74년이 지났다
 
순천교(일명 장대다리) 옆에 조성된 '여순 10.19 평화공원' 안에 세워진 평화의 탑.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를 적은 조약돌이 쌓여있다.
 순천교(일명 장대다리) 옆에 조성된 "여순 10.19 평화공원" 안에 세워진 평화의 탑.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를 적은 조약돌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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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을 두둔하지 말고, 교과서에 나온 대로 가르치세요."

지난 25일, 전남 순천시 순천교 인근에 조성된 '여순 10.19 평화공원'을 교사들과 답사하던 중 한 시민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나무라듯 던진 말이다. 그 말인즉슨, 여순사건은 반란이고 민간인 학살은 불가피했다는 주장이다. 또, 여기서 교과서란 그가 학창 시절 배운 교과서를 말한다.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그는 틀렸다. 지금 교과서에서 '반란'이라는 단어는 삭제됐다. '여순 10.19 사건'으로 바뀐 건 이미 오래전이다. '반란군'은 '좌파 중심의 일부 군인'으로 재규정됐다. 곧, 그가 교과서대로 가르치라는 건, 자신이 배운 옛 교과서를 따르라는 억지 주장이다. 

안타까운 건, 그 같은 이들이 주위에 적지 않다는 점이다. 현대사 관련 답사를 진행할 때마다 그렇듯 발끈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대개는 60~70대 어르신들이 많지만, 40~50대도 적지 않고, 요즘 들어서는 20대 청년도 더러 보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현대사 서술이 '좌파적'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에겐 제주 4.3은 '폭동'이며, 여순사건은 '반란'이고,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 사태'다. 역사적 평가가 끝나 관련 법이 바뀌고 교과서의 내용도 개정됐지만, 그들의 의식은 학창 시절 때 배웠던 것에서 멈춰 섰거나 되레 퇴행했다. 사실 왜곡이 횡행하는 극우 성향의 유튜브에 포획된 탓이다. 

그들에겐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대체로 목소리가 크다는 점이다. 설령 왜곡된 사실이거나 논리에 어긋난 주장일지라도 늘 거침없고 당당하다. 그들은 웬만해선 설득도 안 된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믿음이 워낙 확고해 토론을 벌일라치면 자칫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반대로, 이번처럼 그들의 억지 주장을 듣는 쪽에서는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라며 외면하는 게 보통이다. 그들처럼 상대방에게 다가가 잘못된 내용을 바루도록 지적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언뜻 상대방의 악다구니 앞에 주눅이 든 모습처럼 비치기도 한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어언 74년이 지났다. 특별법이 제정되어 범정부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조사 활동이 시작되었음에도 빨갱이 낙인을 두려워하는 야만의 세월이 지속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금언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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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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