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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그룹 '반려인의 세계'는 반려동물에 대한 고민과 반려동물로 인해 달라지는 반려인들의 삶을 다룹니다. 이번 주제는 '반려인들의 언어'입니다. [편집자말]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분명 남편은 출근하고 없는데 수상한 부스럭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바로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서 침대 주변만 슬쩍 확인해보면, 내 옆에서 평온하게 자고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없는 녀석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뜻이다. 부스럭 소리의 규모가 집요하고 커진다 싶으면 용의자를 확정한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

"이여름! 쓰레기통 뒤지지 마!"

소리가 딱 멈추면서 리트리버 여름이가 꼬리를 흔들며 안방으로 들어온다. '이'는 남편의 성이다. 반려동물이 말을 안 들을 때는 배우자 성을 붙이는 게 우리집 국룰이다. 결혼 후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우리 집의 언어생활은 꽤 많이 달라졌다. 따로 정한 적 없는데도 30여 년 동안 입에 올린 적 없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무엇보다 대체로 혀가 짧아졌다.

대화가 필요한 순간 "그랬어?" 

사회에서는 어엿한 성인의 언어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반려동물이 기다리는 집에 들어오는 순간 서너 살 아이와 대화하는 말투로 탈바꿈하는 게 우리 집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사람 둘, 개 하나, 고양이 세 마리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을 떠올려보면, 바로 이 문장이다. "(그래쪄?에 가까운)그랬어?"

집에 들어올 때 현관으로 마중 나오는 개나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도 '응, 그랬어~' 하고, 노트북 모니터를 가로막으며 골골거리는 고양이에게도 '그랬어? 심심했어?' 하고, 목욕한 뒤 드라이기로 털을 말리기 싫어서 품으로 파고드는 개에게도 '그랬어? 싫었어?' 하며 독심술을 펼친다.

대화는 나눌 수 없지만, 우리 사이에는 매순간 쌓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있다. 말 못 하는 동물이지만 때로는 응석 부리는 말을 쏟아내는 것 같고, 때로는 다정한 사랑의 언어를 전달하려는 것도 같다. 의사소통 방식은 다르지만 '말'을 주로 사용하는 인간으로서는 '그랬어?' 하고 맞장구 치는 것으로 이 대화에 응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응석부리듯 품으로 파고드는 고양이
 응석부리듯 품으로 파고드는 고양이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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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빠르게 늙어도 너는 '큰 아기' 

반려동물은 왜 나이를 먹어도 이토록 아기 같기만 할까. 내 품으로 가만히 다가와서 꼬리를 말고 자리를 잡는 고양이의 체온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한다. 침대에 올라오고 싶어 허락을 받으려고 침대 위에 턱을 걸치고 눈동자를 굴리는 개를 보면 귀엽고 짠한 마음에 절로 머리를 쓰다듬게 된다. 이럴 때면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건만 '우리 아기'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아기는 모두 사랑스럽다. 어린 동물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귀엽다. 그리고 '내가 키우는 동물'은 어리지 않아도 여전히 아기 같다. 물론 대형견 여름이는 사실상 '아기'라고 하기에는 웬만한 초등학생 체중과 맞먹는 몸집을 자랑하지만, 하는 행동은 여전히 스스로를 아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 큰 덩치로 남편의 무릎 위에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관심을 끌려고 끼잉 소리를 낸다. 관심을 주지 않으면 시무룩하고, 쓰다듬어주면 순수하고 솔직하게 기뻐한다. 덕분에 우리 집에서는 여름이를 '큰 아기'라고 부른다. 그래서 여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바로 '우리 큰 아기, 그랬어?'로 완성된다. 
 
몸집은 커도 아기 같은 표정의 여름이
 몸집은 커도 아기 같은 표정의 여름이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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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 먹고, '응가' 하고 

동네에서 여름이와 산책하다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들을 만나면, 백이면 백 여름이를 가리키며 '멈머다, 멈머!'라고 외친다. '강아지'의 아기용 단어가 '멈머'인 모양이다. 그런데 실은 성인 두 명이 사는 우리 집에서도 아기들이나 쓸 법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우리 집 개와 고양이는 '간식' 대신 '까까'를 먹고, 씻고 나면 '몸을 터는' 대신 '푸드득'을 하고, '배변'이 아니라 '응가'를 하러 나간다.

인터넷에서 이런 유머 게시글을 본 적이 있다. 회사에서 심각한 분위기로 회의를 하던 중, 집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장님이 한숨을 푹 쉬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맘마 먹고 합시다.' 웃긴 일화지만 아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을 것이다. 나도 연애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 우리 부부의 사이에 '응가'라는 유치한(?) 단어가 등장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과 각각 여름이 산책을 시키고 나면 서로 '여름이 응가 했어?', '오늘 응가 상태 어땠어?'의 정보를 교환한다. 배변 상태가 좋지 않으면 컨디션이 나쁜지, 어떤 간식 때문인지, 알러지 반응인지 등을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굳이 아기 대하듯 말하게 되는 건 왜일까.

이유를 생각할 것도 없이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순간 보호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본능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사회에서 아무리 웃음기 없이 시크한 사람이라고 해도, 집에 반려동물이 있다면 반려동물과 대화할 때만큼은 분명 단어가 의성어 위주로 바뀌고 혀가 짧아질 것이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늘 어린 아기이거나 혹은 큰 아기고, 우리의 보호를 받는 그 보드랍고 소중한 생명체에겐 늘 다정한 목소리가 필요한 법이라서 말이다. 

태그:#반려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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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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