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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하고 공들여 촬영한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연주 영상을 네이버 카페 '피아노 사랑' 게시판에 올렸다.

아마추어 유단자 수준의 취미생뿐만 아니라 전공생에 프로 피아니스트까지 바글바글한 곳이라 좀 부담됐는데, (격려와 응원의 의미가 크겠지만) '너무 잘 들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연주였다' 같은 칭찬의 댓글이 달리니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상 못 한 댓글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시네요~ 연주 소리도 좋은데 암보까지 하시고."
"와~멋져요! 전 몇백 번을 쳤는데도 암보를 못 해요. 작정하고 외우면 되려나요."


곡을 외우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는 않았다. 같은 곡을 골백 번 연습하다 보니 건반을 누르는 근육 움직임을 통째로 기억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태엽 감긴 인형처럼 자동으로 연주했을 뿐이다.

사실 거의 모든 프로 연주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암보로 연주하며, 취미 삼아 가볍게 배우는 아이들도 경연대회 준비곡은 응당 외워서 친다. 내가 뭔가 특출난 능력을 보여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취미생 중에는 간혹 암보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마다 암기력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암보에 대해 의외로 몰랐던 것
 
 최고의 연주를 들려줘야 하는 상황에서 근육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최고의 연주를 들려줘야 하는 상황에서 근육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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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외워서 연주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암보를 통해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소리 자체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정신적 여력이 생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유체이탈 비슷한 상태가 되는데, 손가락은 알아서 돌아가고 연주자는 자유롭게 소리만 듣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의 연주 소리를 객관화해서 듣게 되면 한층 세심하고 정교하게 음향을 조탁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극한의 완성도로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암보는 필수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암보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1819-1896)을 암보로 연주한 첫 피아니스트로 꼽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렇지 않다.

헨델은 시력을 잃은 1751년 이후 암보로 연주했으며, 모차르트는 1777년 10월 2일에 쓴 편지에서 자신이 귀족 주최 연주회에 참가해 여러 번 암보로 연주했다고 적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연주는 모두 일회성 이벤트였으며, 당시 연주자가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례하고 거만한 행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클라라 슈만은 그런 통념을 깨고 13살 이후 공개적인 연주회에서 초지일관 악보 없이 연주했다. 그렇다 보니 클라라가 암보로 연주한 첫 번째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것이다. 리스트 같은 동시대의 거장도 악보 없이 연주하게 되면서 점차 암보로 연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중반 서양의 중산층 성장과 맞물려있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은 취미로 악기를 배우고 공연장을 찾으며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사한 볼거리를 원했는데, 클라라, 리스트, 파가니니처럼 초인적인 연주를 보여주는 음악가가 그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 거장들은 악보 없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을 다른 연주자와 차별화했는데, 대중들이 이런 퍼포먼스에 열광적으로 호응하면서 암보는 유행이 되어 퍼져나갔다.

암보가 정착된 또 다른 요인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등 바로크 및 고전파 작곡가 곡을 연주하는 공연이 자주 열렸다.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굴하고 연주회를 개최해 큰 성공을 거둔 게 좋은 예다.

이내 바로크 및 고전파 거장의 곡은 종교의 경전처럼 '고전'으로서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악보에 표기된 그대로 충실하게 연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성경 구절을 암송하듯 외워서 연주하는 것이 진지한 태도로 인정받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프로 연주자가 악보를 펴놓으면 성의가 없거나 청중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근육 기억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건 죄다 프로 연주자한테나 해당하는 얘기다. 내가 집구석에서 악보 보고 치든 외워서 치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솔직히 외워 칠 수 있는 곡도 극히 적은 데다가, 악보 펴놓는다고 해도 그럴싸하게 칠 수 있는 곡은 많지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방구석 취미생인 나도 완벽하게 외워서 쳐야 할 상황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방문한 리조트 로비에서 우연히 피아노와 마주친다.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가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손가락은 슬그머니 건반 위로 올라가고 이내 브람스의 인터메조 Op.118 No.2의 음률이 시작된다. 악보가 없으니 시선은 자유롭다. 성실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연출하려면 고개를 약간 숙여 건반을 응시하자.

엘레강스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면 가끔 시선을 10~15도 위로 두는 것도 좋다. 다만 20도가 넘으면 거만해 보이고, 30도를 넘어가면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 조심하자. 따뜻하고 소박한 나르시시즘에 젖어 5분 남짓 주변 공기의 울림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이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탐닉하기 위해서는 일단, 곡을 외워야 한다.

프로 피아니스트들은 나름의 암보 비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래저래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아마추어 취미생 대부분이 곡을 외우는 방법인 근육 기억(Muscle Memory)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근육 기억은 반복된 연습을 통해 몸이 자동으로 연주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내가 브람스 인터메조를 외워서 연주할 때는 악보에 표기된 음을 일일이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아니다. 구구단을 외우듯 자동으로 몸이 움직여 건반을 누를 뿐이다. 이 근육 기억의 취약성을 명확히 인지한 것은 개인 레슨을 받을 때였다.

다음 악보에 나오는, 연속으로 화음을 연주하는 부분을 배우고 있었다. 깨끗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손 모양과 타건 방식을 교정하는 중이었는데, 곡을 외운 상태라 따로 악보를 펴놓지는 않았다. 레슨 선생님이 우선 왼손 화음만 따로 쳐보자고 했는데, 순간 어떻게 쳐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이 부분을 연습하면서 근육 기억의 치명적인 한계를 체험했다.
▲ 브람스 인터메조 Brahms Intermezzo Op.118 No.2 이 부분을 연습하면서 근육 기억의 치명적인 한계를 체험했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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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곡 전체를 외워서 칠 수 있는데, 왼손 화음만 치려니 어떤 건반을 짚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댄 것이다. 오른손을 올려서 함께 치는 시늉을 하니 그제야 왼손이 제자리를 찾는 것 아닌가. 바로 이게 근육 기억의 치명적인 한계다.

반복된 연습 과정 내내 오른손과 왼손을 동시에 연주하면서 근육 기억이 형성되었으니, 오른손 없이 왼손만 연주하는 상황은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움직임이다. 당연히 버벅댈 수밖에. 첫째 마디가 아니라 중간부터 연주해보자는 선생님의 지시에도 손이 선뜻 따라주지 않았다. 근육 기억은 항상 앞선 연주(근육 움직임)와 연계되어서 형성되기 때문에, 임의의 마디부터 시작하게 되면 앞선 동작의 부재로 근육 기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연주 도중 예기치 않은 실수를 범했다 치자. 언급했다시피 근육 기억은 앞선 연주(근육 움직임)와 연계되어서 기억이 작동한다. 실수 행위는 기억되지 않은 돌발적 움직임이기 때문에 이어지는 연주에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고 심하면 연주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연습실 환경과 무대 환경이 크게 다를 경우, 이 역시 근육 기억에 영향을 미쳐 예민한 사람의 경우 아예 첫 음부터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연주를 들려줘야 하는 상황에서 근육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근육 기억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습 방법이 요구된다. 매우 느린 속도로 연습해본다든지, 부점 리듬으로 해본다든지, 오른손 왼손 따로 쳐 본다든지, 중간부터 쳐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며 연습해야 설사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일방통행식 근육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다.

곡을 반복 청취하고, 마음속으로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연습하는 것도 암보에 도움이 된다. 유독 잘 안 외워지는 부분이 있다면 괜히 처음부터 다시 치지 말고 해당 부분을 집중적으로 반복 연습한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 암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인 앞에서 연주하거나 휴대폰 녹음 기능을 켜놓고 연주를 해보는 것도 좋다.

끊임없이 악보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피아니스트들

뭐가 이렇게 까다롭고 번거롭냐고? 프로들은 여기서 훨씬 더 나간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악보를 연구하고 분석한다. 연주할 곡을 화성적 및 구조적으로 낱낱이 파헤쳐 사진 찍는 수준으로 악보를 익힌다. 그 결과 피아노가 없더라도 머릿속으로 가상 연습을 할 수 있을 수준에 이른다.

이렇게 신물 나올 정도로 갈고닦아도 일순간 방심하고 나태해지면 무대에서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2000년 쇼팽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윤디 리처럼 말이다. 2015년 10월 30일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윤디 리와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연습 부족 때문인지 컨디션 난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윤디는 도입부부터 실수를 연발하더니 나중에는 악보를 까먹어 연주가 잠시 중단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게 피아니스트의 실수였는데 되레 지휘자에게 짜증을 내 관객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2000년 쇼팽 콩쿠르 때에도 연주한 곡이니, 소싯적부터 얼마나 반복해서 연습하고 외웠겠는가. 최고의 피아니스트조차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공들여 외운 연주가 일순간 허물어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물론 나 같은 방구석 피아니스트는 연주하다 생각이 안 나면 겸연쩍은 웃음을 머금고 머리를 긁적이며 "에구. 까먹었네요"를 시전하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마추어에게만 허락되는 최고의 특권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그 담백한 모습에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특권도 남용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 아등바등 피아노를 연습하는 이유가 "에구. 까먹었네요"를 연발하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

소소하게나마 나르시시즘에 젖을 수 있는 곡이라고는 5분짜리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하나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잊어버리면 방구석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진다. 그래! 적어도 브람스 인터메조에 한해서는 머릿속 가상 연주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해 보자. 리조트 로비에 놓인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아빠의 모습을 견지하기 위해 근육과 두뇌에 불가역적인 수준의 기억을 새기련다.
 
2014년 모 리조트에서 두 딸의 관심 속에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 가족 여행 중 피아노 연주 2014년 모 리조트에서 두 딸의 관심 속에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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