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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이끌어가고 있는 예술가, 기획자, 지역 리더, 문화신민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기자말]
경남 김해 봉황동 가야대장간에서 전병진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인사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오늘날은 낯선 단어인 '대장장이'.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는 10년 이상 달군 쇠를 두드려 칼, 호미 등 물건을 만들어야만 대장장이라고 인정을 받는다.

그의 나이 열일곱부터 망치와 달군 쇠를 잡았으니 가야대장간 전 대표의 대장장이 경력만 40년이 넘는다. 전 대표의 인사가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칼 하나를 만들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다는 그다.
  
가야대장간 전병진 대표가 밝게 웃고 있다.
 가야대장간 전병진 대표가 밝게 웃고 있다.
ⓒ 김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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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는 철, 구리 등 금속을 불로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호미, 낫, 칼 등 농기구와 연장을 만드는 기술자를 말한다. 과거 대장간은 불을 지피는 기구인 풀무와 1000도가 넘는 불이 끓는 화로가 기본 설비로 갖춰져 있었다. 이외에 모루, 메, 망치, 집게 등 연장이 대장장이 손에 들렸다.

대장장이의 일은 고됐다.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과 담금질을 한다. 그때 필요한 건 오직 힘과 손의 기술이었다. 그다음 감을 잡는다.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쇠를 불려서 만든 쇠붙이를 토막 내는 작업이다.

감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 수메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이게 끝이 아니다.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에 박아낸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장장이가 호미 하나를 만드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산업화 이후 기계에 밀려 대장장이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전국에 남은 대장장이는 20명이 채 안 된다.

아들에게 전수해 준 기술

"공부 안 할 거면, 기술이라도 배워라."

1970년대 후반, 중학교에 다니던 어린 전 대표는 사정이 생겨 공부를 포기하게 됐다. 전 대표의 아버지는 공부를 포기한 아들이 힘든 일을 하게 되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줄 알았다.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매형의 소개로 부산 '한양공업사'에서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다.

1400도의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로 앞은 선풍기 한 대도 없었다. 당시 150cm밖에 안되는 작은 키의 어린 전 대표는 메를 들고, 망치를 잡고 오로지 힘과 기술로 불 앞에 달구어진 쇠를 늘어뜨렸다.

"어릴 적부터 멀쩡한 물건도 뜯고, 조립해서 다시 만들어보는 걸 즐겼어요.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해보면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물론 힘이야 들었죠. 생각해보세요. 150cm 작은 애가 메를 들고 망치질을 하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근데 힘은 드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이거는 꼭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구어진 쇠를 내가 원하는 대로 두드리면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잖아요."
 
전 대표가 직접 칼을 갈고 있다.
 전 대표가 직접 칼을 갈고 있다.
ⓒ 김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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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표는 우연히 시작한 대장장이 일에서 흥미를 느꼈다. 몸은 힘들어도 일이 즐거우니 기술을 배우는 것조차 즐거웠다. 산업화가 되면서 1970년부터 대장간은 사양 사업이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과 양산 등지에 쇠를 두드려서 물건을 만드는 대장간이 공장 형태로 남아 있었다. 전 대표는 열일곱부터 시작한 대장장이 일을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계속했다.

전 대표는 1992년 결혼 후, 1994년 김해 대동면 초정리에 '원농기구'라는 자신의 공장을 차렸다. 대장장이 일을 할수록 그의 마음에는 자부심이 생겨났다. 힘들었지만 자신이 만든 농기구와 칼 등 제품을 찾아주는 소매업체도 점점 늘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후 1998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으면서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물밀 듯이 국내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그는 제주도, 서울을 오가며 거래처를 뚫으러 전국을 다녔다. 같이 일했던 직원들의 월급을 맞춰 주기 위해 한 달, 한 달이 절박했다. 매일 쇠를 두드리고, 거래처를 넓히며 정말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값싼 중국산의 경쟁력에 밀려 문을 닫는 공장들이 늘어만 갔다.

"당시에 국산 호미가 도매가가 1700원이었어요. 근데 1998년 이후 중국산 호미가 도매가로 170원에 들어오더라고요. 당연히 소매점들은 값싼 중국산을 찾게 되죠. 국내에서는 인건비는 점점 올라가죠. 가격 경쟁에서 중국산에 밀려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반 정도 만들어진 중국산 반제품을 가지고 와서, 완제품으로 만든 뒤 판매하는 업체들이 늘어났어요. 저도 유혹이 생겼죠. 근데 저는 그러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쇠를 메질하는 것부터 완성까지 하던 일을 반제품을 들여와 가공만 하게 되면 이전에 있던 과정에 필요한 기계와 설비는 무용지물이 된다. 거기에다 이전 과정에 필요했던 인력까지 없어지게 된다.

"중국산 반제품을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당장은 편했죠. 근데 인력도, 설비도 필요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술도 영영 사라지게 되더라고요. 그때 저는 '나는 적게 먹고 적게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기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죠. 값싼 중국산 제품들 때문에 약 10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힘든 고비를 넘기고 포기하지 않다 보니, 이제는 대장장이가 귀한 대접을 받네요."

2018년에 부산 북구 구포동 구포시장에 '가야대장간'이라는 소매점을 열었다. 자기 일을 배우겠다는 아들 전현배 대표 때문이었다.

"아내가 아들 어릴 적에 아들한테 '아빠 기술은 꼭 한 번 배워놔라'고 당부했었거든요. 어느 날 대학 다니던 아들이 제 일을 배우고 싶다 하더군요. 근데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일은 정말 힘들거든요. 게다가 시장 흐름에 따라 가격도 오락가락하고요. 직접 만들고, 판매도 하면 좋겠다 싶어 구포시장에 소매점을 차렸죠."

좋은 재료를 몇 백 번, 몇 천 번 두드려
     
가야대장간 한 쪽에는 쇠로 만든 제품들이 전시 돼 있다.
 가야대장간 한 쪽에는 쇠로 만든 제품들이 전시 돼 있다.
ⓒ 김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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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구포동에 있었던 가야대장간은 김해 봉황동 봉리단길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들 전현배씨도 전 대표와 함께 대표 명함을 내고, 가야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가야대장간 안에는 호미, 낫, 무쇠솥 등 쇠를 두드려 만든 각종 제품이 즐비하다. 3천 원부터 8만 원대까지 각종 칼이 진열돼 있다. 칼에는 '가야'라는 브랜드가 모두 새겨져 있다.

전 대표는 "단조 칼은 철판을 잘라내서 날을 만든 스테인리스 칼과는 비교도 안 돼요.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집니다. 한 번 단조 칼을 쓰던 분들은 스테인리스 칼을 다시 잡지 않으세요. 딱 써보면 다르다는 걸 느끼거든요"라고 말했다.
 
가야대장간에는 전 대표가 쇠를 달구어 직접 만든 칼과 낫 등이 판매되고 있다.
 가야대장간에는 전 대표가 쇠를 달구어 직접 만든 칼과 낫 등이 판매되고 있다.
ⓒ 김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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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의 힘과 기술이 고스란히 들어간 단조 칼을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는 전국에 20명이 채 안 된다. 가업을 중시하고 장인을 귀하게 여기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대장장이들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학과 지자체가 협업해서 소량이라도 좋은 재료를 만들 수 있도록 재료 지원, 연구 지원을 해줘요. 그러다 보니 일본 칼이 좋을 수밖에 없죠. 한국은 이런 시스템이 전무 합니다. 그래도 이 가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열처리 시설도 들이고, 외국 기술도 접목해서 더 나은 물건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일본 칼, 독일 칼 좋다고들 하지만 좋은 재료를 몇 백 번, 몇 천 번 두드리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죠. 사람들에게 '전병진이 그 사람 옹고집이야, 칼 하나는 잘 만들어'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과거 금관가야의 중심이었던 봉황동에 새롭게 문을 연 전 대표는 가야 시대에 쓰던 쇠붙이들을 복원해, 전시장을 만들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전 대표는 "지금 젊은 세대들은 '대장간', '대장장이' 단어만 들어도 낯설잖아요. 꿈이 있다면 옛 선조들의 대장간 모습도 재현하면서 그들이 만들었던 옛 물건을 복원해보고 싶어요. 제가 복원한 물건들이 전시공간에 차곡차곡 전시될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본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경상남도, 김해시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김해문화도시센터 블로그에 중복 게재 됩니다. https://blog.naver.com/ghcc_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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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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