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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이브 대국민 사과 이후로 김건희씨가 남편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지금의 기세를 볼 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만약 대통령에 당선되면 '대통령 부인 김건희'의 국정 개입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도 하다.

김건희씨는 지난해 7월 20일 이명수 <서울의 소리> 기자와의 통화에서 무정스님이 자신과 윤석열을 소개해준 일을 언급하다가 "그분이 처음에 소개할 때도 너희들은 완전 반대다. 김건희가 완전 남자고 석열이는 완전 여자다"라고 했다고 한 뒤 "근데 정말 결혼을 해보니까 그게 진짜인 거야, 내가 남자고 우리 남편이 여자인 거야"라고 말했다. "드라마 보면서 쭉쭉 우는 게 우리 남편이에요. 영화 보면 제일 눈물 많고"라고 덧붙였다(관련 기사: 김건희 "무정 스님이 그랬어요, 김건희는 남자고 윤석열은 여자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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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문제는 윤석열 후보의 문제... 적어도 대선 정국에서는

'여성은 약하고 남성은 강하다'는 공식은 봉건시대 유물이지만, 김건희씨와 무정스님의 대화에서 이 공식은 유효하게 사용됐다. "내가 남자고 우리 남편이 여자"라는 김건희씨의 언급은 자신이 남편보다 기운이 강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역학 구도가 국정운영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윤석열 후보 경우에는 그런 우려를 할 만도 하다. 부인 문제에 대해 명확히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자꾸만 회피하는 모습은 그가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김건희 문제는 대선 정국에서만큼은 윤석열 후보 자신의 문제다. 국민들이 김건희 씨 실상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김건희 후보'가 아니라 '윤석열 후보'를 검증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윤석열 자신이 김건희 문제를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부인과 기자의 통화 내용이 온 세상에 공개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윤석열이 부인 문제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부인뿐 아니라 부인의 혈육에 대해서도 엄정히 대처하지 못했다. 검사 시절에 장모 최은순씨의 위법행위를 말리지 못한 데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일례로, 지난해 12월 23일 의정부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최은순이 동업자와 공모해 총 349억 원 상당의 신안상호저축은행 잔고증명서를 위조하고 이를 법원에 제출했으며 부동산을 차명으로 소유해 부동산실명법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이런 행위들이 일어난 시점은 2013년 1월부터 8월까지다. 윤석열이 결혼한 2012년 3월 이후에 일어났던 것이다. 1심 재판 당시 최은순은 잔고증명서 위조 사실을 인정했다. 사위가 검사일 당시, 위법을 저질렀다는 점이 장모 자신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2013년 10월 21일 검사 윤석열은 국정감사장에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그가 그렇게 추상같은 모습을 보이던 시기에 그의 장모는 349억 상당의 잔고증명서를 위조했다고 법원은 판단한 것이다.

윤석열, 친인척 문제 잘 처리할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장모 최은순씨가 지난 12월 23일 의정부지방법원에서  '통장 잔고증명 위조' 관련 1심 선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법정을 나오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장모 최은순씨가 지난 12월 23일 의정부지방법원에서 "통장 잔고증명 위조" 관련 1심 선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법정을 나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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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친인척 관계를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요구 사항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과 박근혜 선거부정을 수사하느라 처가에 신경 쓰기 힘들었다는 말은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공직자는 바쁘고 힘들지라도 주변 단속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요구 사항이다. 부인과 관련된 의혹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에 더해 장모의 위법행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은 윤석열이 친인척 문제를 엄정하게 처리할 역량이 있는지를 의심케 할 만하다.

윤석열은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평가했다. 바로 그 전두환 정치를 망친 것 중 하나가 '이순자족'의 발호였다. 전두환 집안과 함께 이순자 집안이 대통령 힘을 믿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이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
     
1982년 5월 5일 구속된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꾼' 장영자씨는 이순자씨의 작은아버지인 이규광의 처제다. 짜장면이 300원 정도이던 1980년대 초반에 장영자는 7111억 원어치의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고 한다.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섣불리 벌일 수 없었을 일이었다.

전두환과 이순자 
 
2020년 4월 27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2020년 4월 27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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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들은 그 돈의 흐름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청와대나 이순자와의 관련성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장영자가 그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물 쓰고 다닌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거액의 돈이 민주정의당(민정당)에 흘러갔다, 이순자와 관련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로 인해 민심이 동요하자, 정권 브레인인 허화평·허삼수 두 참모가 나섰다. 1979년 12.12쿠데타 이전부터 전두환의 정치 행보를 기획해온 이들은 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이순자족에 대한 공세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5월 18일 구속된 인물이 이규광이다. 두 허씨가 그를 구속하라고 촉구한 결과였다.

허씨들은 차제에 이순자족을 전두환과 떼어놓고자 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을 통해 위험 요인을 제거하자는 것이 허씨들의 의도였다. 전두환만 믿고 있다가는 사태를 그르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기 집안에 대한 이같은 공격에 이순자는 발끈했다. 그는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허화평·허삼수를 "권력 주변의 부나방들"로 폄하하면서 "(부나방들이) 작은 아버님을 감옥이라는 나락으로 내몰고야 말았다"고 원통해했다. 훗날 자서전을 쓸 때도 이처럼 분해 했으니, 1982년 당시에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전두환의 처신이었다.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했는가가 중요하다. 전두환은 처가로 인한 국정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처가를 보호하는 쪽을 선택했다. 5월 20일 국면전환용으로 민정당 당직개편을 단행할 때, 허씨 쪽 라인인 권정달 사무총장을 해임하고 허씨들과 갈등관계인 권익현을 대신 앉혔다.

그러자 두 허씨들이 반격을 개시했다. 5월 22일, 12.12 주역들을 서울 궁정동 안기부장 사무실(안가)에 모아놓고 이순자족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친인척 비리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 회의에서 도출됐고, 노태우 내무부장관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됐다.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 멤버들이 이순자족 숙청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순자족이 너무 커졌다는 점은 도외시한 채, 허씨들이 너무 커졌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그래서 그런 건의가 자신한테 들어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자족' 빼려던 허씨들, 오히려 의사결정서 배제돼 

1994년 2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남산의 부장들 173'은 1982년 당시의 '청와대 고위 인사' 발언을 인용해 "(전두환은) 그 모임을 계기로 허씨들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습니다"라며 이때부터 두 핵심 참모를 주요 의사결정에서 배제했다고 말한다. 1982년 중반부터 눈칫밥을 먹기 시작한 두 허씨는 그해 12월 20일 청와대를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최고 핵심들이 이순자족의 등쌀을 견디지 못했던 셈이다.

전두환은 이순자족의 발호를 막지 못했고, 이순자족은 전두환 친척들과 더불어 국정 위기를 한층 가중시켰다. 안 그래도 정통성이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태그:#김건희, #윤석열, #대통령선거, #전두환,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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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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