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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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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곡 박동완 선생이 긴 세월 기름진 곳, 양지쪽에 곁눈 팔지않고, 무사안일도 취하지 않고, 지성일관ㆍ초지일관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정신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질풍노도의 시대에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고결하게 살 수 있었던 그 원형질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들의 삶은 고달프고 험난했다.

기독교 전도사의 위치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오르고, 이후 각급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언론인으로 활동 그리고 망명객이 된 그의 삶은 험난하고 고달팠다. 그런 속에서도 그의 생애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행보였다. 

무엇보다 '민족대표 33인'의 위상은 동포와 일제로부터 2중의 압박을 받아야 하는 자리였다. 동포들은 일제의 압제가 심해질수록 독립의 구심으로 기대심리가 높았고, 총독부는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협박과 회유도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움이 따랐고, 그는 그 모든 곤경을 극복하였다. 

그는 근곡(槿谷)이란 아호를 썼다.
'무궁화동산'은 조선의 상징어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거나 작명가의 작품이지만, 아호는 대부분 자신이 지은 것이다. 따라서 본명보다 아호에서 더욱 그 인물의 정체성이 묻어난다. 백범(白凡)ㆍ심산(心山)ㆍ단재(丹齋)ㆍ예관(晲觀) 등에 담긴 의미가 답이 될 것이다. 

박동완 선생은 1915년 당시 국내 유일의 민족지 <기독신보>의 주필ㆍ편집인으로서 근곡을 비롯 근생(槿生)ㆍ근(槿)ㆍ근곡생(槿谷生)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글을 썼다. 

하나같이 무궁화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ㅂ ㄷ ㅇ 싱, ㅂ ㅅ, , ㅂ ㄷ ㅇ 등의 필명도 사용했지만 주요 작품에는 '무궁화 근'의 아호를 적었다. 그가 "삼천리 방방곡곡 무궁화"를 뜻하는 '무궁화 근(槿)' 자를 아호로 삼고, 공공연히 글을 쓴 데는 나름의 역사인식 즉 나라사랑 정신에서 비롯하였다. 무궁화가 '나라 꽃'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구한말 개화기다. 1904년 영국군함이 제물포에 입항하면서 조선의 국가를 연주하겠다는 의사에 고종이 분부를 내려 국가를 지었다. 

이때 애국가 후렴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국화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고, 1907년 <찬미가집>에 실리면서 민중들 사이에 널리 불리었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무궁화는 민족혼의 상징이고 자신의 정신적 준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1910년 일제의 조선병탄에 항거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가 전해지면서 무궁화는 국민의 마음 속에 더욱 뜨겁게 자리잡게 되었다.

새와 짐승도 슬퍼서 울고 강산도 슬퍼하는데 
무궁화 삼천리는 물에 잠겼도다  
가을밤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천고(千古)의 일을 생각하니
인간으로서 글 아는 사람 되기 참으로 어렵구나. (주석 1)

매천은 망국의 국치를 "무궁화 삼천리는 물에 잠겼다"라고 비유하였다. 이처럼 한말 개화지식인들이 무궁화를 국화로 인식하면서 각종 시문을 지었다. 역설적이지만 일제가 무궁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살펴보면, 무궁화에 관한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게 된다. <총독부 고등경찰 사전>에 실린 내용이다.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2천여 년 전 중국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조 시대에는 온 국민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상ㆍ의학상에 진중 (珍重)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의 사꾸라, 영국의 장미처럼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서 이화(李花)가 왕실화로 되면서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부터 차차 소원해진 것이다.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유지들은 민족 사상의 고취와 국민 정신의 통일 진작을 위하여, 글과 말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그 수명이 잠깐이지만, 무궁화만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서 3∼4개월을 연속 필 뿐 아니라 그 고결함은 위인 (偉人)의 풍모라고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궁화 강산' 운운하는 것은 자존(自尊)된 조선의 별칭인데, 대정(大正) 8년 기미운동(3.1운동을 말함) 이래 일반에게 널리 호용(呼用) 되었으며, 주로 불온(不穩)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화(槿花), 무궁화, 근역(槿域) 등은 모두 불온한 문구로 쓰고 있는 것이다. (주석 2)

박동완 선생은 무궁화를 아호로 삼아 우국정성의 글을 쓰고 민족대표 33인으로 구속되었다. 

만기 석방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서 남궁억은 1912년 배화학당 교사 시절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여 무궁화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한반도를 우리나라의 13도를 상징하는 무궁화 13송이와 백두대간을 상징하는 무궁화 가지를 수놓은 것이다. 울릉도와 제주도는 무궁화 꽃잎으로 수놓았다. 남궁억은 가사시간에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는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하는 길이 생활 속의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석 3)

근곡 박동완과 한서 남궁억의 뜻이 다르지 않았다. 근곡이 보다 사상적이었다면 한서는 보다 실천적이었다.


주석
1> 김삼웅, <매천 황현 평전>, 324쪽, 채륜, 2019. 
2> 류달영ㆍ염도의, <나라꽃 무궁화>, 74~75쪽, 학원사, 1987.
3> 이순자, <남궁억>, 96~97쪽, 독립기념관, 191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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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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