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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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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이 하와이에서 잡지를 발행하고 교민사회의 화합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토해내고 있었다.

1937년 6월 그동안 묵인해왔던 온건하고 타협적인 흥사단 계열의 실력양성단체이던 수양동우회 관계자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검거하고 그중 42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조사 중에 고문으로 최윤세ㆍ이기윤이 옥사하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일제는 재판에 회부한 사람들을 1941년 11월 전원 무죄로 석방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색채를 유지하고 있던 인사들을 회유ㆍ협박하여 전향서를 쓰게 하고, 친일단체에 가입시켜 공개적으로 친일활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박동완과 민족운동을 함께했던 인사들 중에도 전향자가 적지 않았다. 

일제는 같은 해 10월 이른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학교뿐만 아니라 관공서ㆍ은행ㆍ회사ㆍ공장ㆍ상점을 비롯한 모든 직장의 조회와 집회 의식에서 낭송토록 강요하였다.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의 청소년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어갔다. 비슷한 시기 흥업구락부사건이 발생했다.

박동완도 깊이 참여했던 흥업구락부는 1938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회원 10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그 중 54명은 전향성명서를 발표, 친일활동에 나섰다. 

박동완은 필연코 미구에 이런 날이 오리라 예측하면서 하와이에 망명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하와이에서 흥업구락부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같은 고국의 불행한 사건들은 그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 작용하였다.

일제의 만행은 국내에서 계속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창립(1938. 7), 국민징용령(1939. 10), 창씨개명령(1940. 2.) 등 한민족의 말살책이 거침없이 감행되었다.

박동완은 만 55세이던 1941년 2월 23일 눈을 감았다.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은 기습공격하기 열 달 쯤 전이다. 그동안 <신한민보>ㆍ<태평양주보> 등 현지 한인신문이 그의 병환 소식을 보도했지만 그렇게 빨리 소천할 줄을 아무도 몰랐다. 망명 13년이었지만 자기 몫의 집 한 칸이 없었고, 임종을 지키는 가족도 없었다.

장례는 3월 1일 3ㆍ1절기념준비위원회 주도로 이루어져, 교민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하와이 교민사회 전체가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또한 <태평양주보>는 2주에 걸쳐 교민들의 추모기사를 실었다. 교민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실을 들어 '민족적 정신상'으로 삼았으며 고인의 철저한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하와이 교민들의 삶은 여유 있는 편이 못되었다. 그런데도 남은 장례비용과 모아두었던 돈을 합해 본국에 있던 박동완의 유족에게 보내주었다(<태평양주보>, 1941년 7월 5일).    

이러한 사실은 박동완이 하와이 교민들에게 신망이 높았음을 깨닫게 해 준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의 독립과 한인교민들의 화합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만 55세로, 아쉽게도 광복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1941년 4월 우편물 취급으로 고국에 돌아온 그의 유골은 3ㆍ1독립운동에 함께 참여한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장 규식, 2008:18).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ㆍ1절 경축식에서 박동완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그 뒤 1966년 6월, 그의 유해는 서울시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생애는 불교용어인 '처염상정(處染常淨)' 그대로였다. 세속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았다. 평범 속에서도 비범한 결기를 보였고, 초지일관ㆍ지성일관의 자세로 불의와는 비타협의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였다.

그는 3ㆍ1혁명의 공화주의와 국제주의 정신을 실행함으로써 동류들보다 한 발 앞서갔다. 기독교계에서 선각의 횃불을 들었다가 추하게 빛바래지는 군상에 비해 그는 많이 달랐다. 종시일관 소박한 삶을 통해 나라의 설움과 동포의 비애를 다독이며 그들과 함께하였다.

그래서 그의 소천 소식은 현지는 물론 고국의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넘어 마음을 저리게 하였을 것이다.  
     
  
주석
5>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글, 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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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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