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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장재시장(1920년대로 추정)
 군산 장재시장(1920년대로 추정)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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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20년대) 군산 조선인시장(장재시장) 모습이다. 일제가 홍보용으로 만든 엽서 사진으로 '군산명소(群山名所) 선인시장(鮮人市場)'이라 소개하고 있다. 일제는 1915년 2월 장재시장을 개설하고, 부(府)에서 관리하다가 1918년 '군산시장'이라 개칭하였다. 시장개설 전 이 지역은 옥구군 미면 장재리에 속한 조선인 마을이었다.

장재리(藏財里)는 조선 시대 지명으로 1914년 둔율리 일부를 병합, '장재동'이라 하였다. 당시 장재동은 지금의 대명동·평화동·신영동·중앙로2가 일부를 아우르고 있었다(1923년 '군산시가도' 참고). 그 후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1932년 일본식 지명인 장재정(藏財町)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정(町)'을 '동(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1920년대 장재시장 주변 이야기

장재시장은 국내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전군도로)와 접하고 있었고, 기차역도 지척에 있었다. 또한, 도로를 경계로 시외버스터미널과도 마주하고 있어 유동 인구가 많았다. 조선인 동네임에도 부근에 공설목욕탕, 공설이발관, 공설질옥(공설전당포) 등이 자리하였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과 여인숙도 많았다.
 
1928년 6월15일 치 ‘동아일보’ 기사(조인현을 주범으로 표기하고 있다)
 1928년 6월15일 치 ‘동아일보’ 기사(조인현을 주범으로 표기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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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업소 중에는 평북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조인현(가명 오해룡)이 운영하던 '장재여관'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인현(趙仁賢)은 대한통의부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 모금 사명을 띠고 군산에 잠입한다. 권총과 격문을 휴대한 그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장재여관을 개업한 뒤 은밀히 활동하다가 1928년 6월 일경에 체포된다. 그해 나이 37세였다.

장재동 지역에는 조선운송조합, 농기구제작소, 철공소, 요릿집, 사진관, 군산형평사청년회관 등이 자리했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과 여관도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래시장을 낀 가난한 동네여서 그런지 강절도 및 횡령, 고소·고발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인 상점 주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벌인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08년 전군도로(군산-전주) 완공에 이어 1912년 군산선(군산-익산)이 개통되자 그동안 포구 중심으로 활동해온 군산 객주들은 타격을 받는다. 육로가 뚫리면서 화물 유통이 해상운송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병행하는 육상운송으로 바뀌었던 것. 객주들은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기차역 인근(현 장재동, 대명동, 신영동 등)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군산 기차역 부근 객주들 신문광고 모음(1922~1924)
 군산 기차역 부근 객주들 신문광고 모음(1922~1924)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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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1922~1924) 중앙지에 광고를 낸 장재시장 인근 객주 및 업소는 영풍호(永豊號), 영창호 운수조(永昌號 運輸組), 유신운송부(畱信運送部), 백운학 객주부(白雲鶴 客主部), 공익상회(共益商會) 천임상회(天任商會), 신일상회(信一商會), 대동상회(大東商會) 김서욱(金瑞旭), 문평중(文平重), 강인묵(姜仁默), 채규현(蔡奎賢), 황호성(黃浩性), 조병희(趙炳熙) 등 20여 명으로 나타난다.

집 한 채 값보다 비쌌다는 전화기를 가진 조선인 객주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객주 이름과 상호에 운수조, 운송부 등이 따라붙는 광고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삼륜차를 포함한 짐차나 우마차 여러 대를 보유했거나 대여가 가능한 객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당시 군산에는 자동차 23대, 화물차 4대, 오토바이 10대 등이 운행되고 있었다.

군산역 부근은 광복 후에도 운수업체가 몰려 있었다. 1950년대 대명·장재동 일대는 군산운수, 삼성운수, 대한운수, 대한택시, 전북여객, 동아여객, 대령정기화물 군산영업소, 한국운수(주) 군산지점 역전취급소 등이 자리했다. 트럭 한두 대 보유한 개인업자도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1963년 현재 군산시에 등록된 차량(승용차, 승합자, 화물차 등)은 모두 169대였다.

추억의 감도가(감독), 최근까지 존재
 
감도가에서 바라본 양키시장, 왼쪽 네모는 감독자리, 오른쪽 네모는 춘천주조장 자리(2009)
 감도가에서 바라본 양키시장, 왼쪽 네모는 감독자리, 오른쪽 네모는 춘천주조장 자리(2009)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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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2월 군산 부청이 장재시장을 신영정 철도부지(현 공설시장 자리)로 이전할 때 한 축을 담당했던 감도가(감독)와 닭전(가축시장)은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장 기능을 유지한다. 그중 감도가는 지금의 튀밥집(뻥튀기집)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었으며, 닭전은 양키시장 입구에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는 1970년대 이후 시나브로 사라졌다.

'감도가'는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 감(柿)을 도산매하는 골목으로 장재시장 개설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번성기 때는 중매인도 여러 명 존재했다고 전한다. '감도가', '감독', '감뚝' 등의 연원은 산지에서 들여온 땡감(먹시)을 우려내기 위해 수십 접(한 접에 100개)씩 들어가는 큰 독(탱크)을 땅에 묻어놓은 것에서 유래한단다.

가을이 시작되면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경매했다. 길바닥에 5~10개씩 벌여놓고 손님을 부르는 행상들과 감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는 금방 우려낸 감이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계절의 전령사'이기도 했다.

스물한 살 때 감도가에서 감장수를 시작, 일흔 넘길 때까지 자리를 지켜왔다는 윤귀섭씨는 '일제강점기에는 땡감을 시멘트와 블록으로 쌓아 만든 대형 탱크에서 우려냈다'고 귀띔한다. 탱크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땡감 한 트럭도 더 들어갔다는 것. 광복 후에도 계속 탱크를 사용하다가 감 소비가 줄어드는 1970년대 이후 쓸모가 없어져 덮어버렸다고 한다.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감(먹시)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감(먹시)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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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는 전주, 김제, 대천, 부여, 대전서도 와서 감을 사 갔고, 목포랑 군산 뱃사람들은 양키시장으로 옷을 사러 옴서 가마니 띠기로 사 갔어유. 그리고 뱃사람들은 그물에다 감물을 들여서 사용혔어유. 감물을 들이믄 줄이 찔겨진다나 어쩐다나···. 허기사 지금도 멀리서 사러 오거나 전화를 혀서 택배로 보내달라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디···."- 관련기사 : 2009년 10월 2일 "일본놈 감으로 지사 지내믄 안되쥬")

산지인 고산, 완주, 진안, 흥덕 등에서 가져와 떫은맛을 가시게 한 다음 중간도매상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팔려나갔다. 하루에 한 트럭 파는 상인도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단다. 그러한 호경기는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했던 춘천주조장을 비롯해 선술집, 해장국집, 튀밥집(뻥튀기집), 떡장수 등도 한몫 했다.

그중 춘천주조장은 문병량 보배그룹 창업주와도 인연이 깊다. 문병량은 군산시 회현면 출신으로 한국전쟁 후 옥구 미군비행장에 근무하다가 1957년 춘천주조장을 인수한다. 감도가에 거주하며 주조장을 운영하던 그는 1963년 원대한 뜻을 품고 이리(익산시)로 이사, 보배소주(보배그룹 태동)를 창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감도가는 외지 뱃사람들까지 찾아와 몇 접씩 사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군산을 대표하는 홍등가로 변하더니 2000년 대명동 화재 참사로 된서리를 맞는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영과 쇠락을 거듭했던 감도가. 토종감을 우려서 파는 업소가 10년 전까지 존재했으나 지금은 을씨년스런 거리에 퇴색된 술집 간판들만 덩그러니 내걸려 있다.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아일보, 조선일보(1920~1930년대), <群山新聞(군산신문>(1947~1948), <미군정·정부수립기·군산지역의 경제·사회상>(1999 군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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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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