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바쁜데 굳이 모여서 제사 지내지 마. 야채 고로케랑 맥주 한 잔 하면서 엄마 생각 해주면 돼." 

우리 엄마는 번번이 자신의 제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질병 하나 없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왜 자신의 제사를 미리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자기 세대에서 겪은 억압을 끊으려던 사람이었다. 민주화 운동으로 20대를 보냈고 성차별이 높았던 80년대에 길거리에서 일부러 담배를 피우며 여성운동 시위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가부장제에 못 이겨 지금은 시아버지의 제사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원래 전 부치는 거 좋아해"라고 말하면서도 이 악습이 자신의 세대에서 멈췄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엄마의 자아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엄마는 편하라고 한 말이지만 듣는 나로서는 상당히 곤란했다. 살아생전에 남의 부모를 모시느라 고생했으니 하늘에서라도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 현 시대의 관습을 끊으려했던 '모던걸'과 그의 자녀들의 한이 맺힌 위로는 나로 하여금 엄마의 마음과 시대를 이해하는 한 줄기 끄나풀이 되었다.
​ 
.
▲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
ⓒ 김현정

관련사진보기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p.83)

소설의 주인공 '심시선'의 가족들은 그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치른다. 살아생전에 형식적인 제사를 반대했던 그였기에, 가족들은 심시선이 살았던 하와이를 걸으며 그를 기억하기로 한다. 그에게서 뻗어나온 자녀들과 손주들은 각자의 고민을 안고 여행길에 오른다. 

<시선으로부터,>는 살아 생전 심시선의 일생이 담긴 인터뷰와 가족들 개개인의 사연을 교차해 서술한다. 그들의 시대는 다르지만, 20세기의 고통과 21세기의 고통은 비슷한 지점에서 맞닿는다. 정세랑 작가는 이 소설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심시선은 가족이 공산주의자로 고발당하자 생존을 위해 하와이로 이민을 간다. 낯선 타지에서 세탁소 일을 하다 독일의 유명 화가의 조수 일을 하며 인간의 폭력성을 몸소 확인한다.

그의 팔에 박힌 유화 나이프는 앞으로의 삶에 전환점이 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사랑이 아닌 자신의 언어를 가지며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 버리는 사람도 있어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 하다." (p.126)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인지한 그는 모든 억압의 형태를 바꿔나갔다. 자식들에게 세속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고, 아들에게는 여성을 하대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또한 의붓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가족 형태를 만들었다.

소설 속 가족의 범위는 '피'로 한정하지 않았다. 인종과 혈통의 연결이 아닌 확장된 범위의 개념이었다. 소설은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공통된 사유를 가진 따뜻한 공동체로 표현했다.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십 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 (p.15)

심시선의 가족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중 손녀 '화수'의 이야기는 유난히 심시선의 비극과 비슷했다.

화수는 회사 거래처 직원으로부터 '염산테러'를 당한다. 가해자는 힘이 없는 여직원 6명이 있는 무리에 염산을 던졌고, 화수는 그 피해로 유산하게 된다. 사건을 접한 대중들은 피해자들이 '대기업' 직원이고 가해자가 '중소기업' 직원이라는 이유로 가해자의 편을 들었다. 

화수는 가해자를 욕하지 않았던 자신의 할머니 심시선을 원망한다. 그것은 20세기의 한계이며 21세기의 변화다. 심시선은 자신의 일을 납득하기까지 몇 십 년이 걸렸다. 여성인권이 화두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피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정의할 만한 단어조차 없었다.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p.143)​

억압에 순응하지 않은 심시선으로부터 나온 가족이기에, 그들은 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심시선의 언어는 시간을 넘어 현재까지 다다랐고, 이제는 과거의 여성들을 대답할 언어가 생겼다.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난 후, 심시선 같은 '기세 좋은 20세기 모던 걸'이 여러 곳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의 가치관이 가족의 형태로 이 사회에 퍼져나가 하나의 사고방식을 가진 무리를 형성한다고 말해준다. 심시선에서부터 가족들이 파생되었듯, 우리는 '특이한' 엄마의 조각들이다.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 (p.67)​

소설은 제사의 진정한 의미는 '정서적 교감'이라고 말해준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한상차림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건 그들의 메시지가 아닐까. 고인이 다음세대에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는 것. 이 또한 떠난 자를 기리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만 해주면 돼'라고 했던 엄마의 말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것 같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은이), 문학동네(2020)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