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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을 목전에 두고 400km가 넘는 제주 올레길 종주에 도전하게 된 것은 분노와 호기심, 설렘의 3단계를 거치면서다.

분노는 당연히 회사에서 촉발되었다. A가 빛의 속도로 부장으로 승진했다. 배가 아프진 않았는데 화가 났다. 더 길게 말하고 싶지만 필요를 못 느껴 이 정도로 갈음하련다. 

두 번째 단계인 호기심은 꽉 막힌 듯한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숨구멍 중 하나인 독서에서 발화되었다. 발화점은 유시민, 조정래, 손석희의 추천 책인 <영초 언니>였다.

소설 <영초 언니>는 유신정권 시절 학생 운동권에 전설처럼 존재한 실존 인물의 생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책의 내용에 따르면, 저자가 도시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한 곳은 올레 7코스의 외돌개이다.

7코스는 필자가 처음 걸어본 올레길이다. 비현실적인 경치에 걸음을 떼기가 힘겨운 아름다운 길이다. 또한 서 이사장이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으로 근무했다는 이력을 확인하고, 내가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 이것은 최소한 운명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나는 제주올레 홈페이지에서 거부할 수 없는 설렘과 마주하게 되었다. 홈페이지에는 425km에 이르는 26개의 코스가 표기된 제주 지도가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올레길
▲ 올레표지 올레길
ⓒ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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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기만 했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의 첫 번째 데이트 신청에 아내가 응했을 때 이후 느껴보지 못한 강도의 설렘이었다. 그렇게 종주를 결심했다. 스스로 목표를 세운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쩌면 태어나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올레길 종주는 결심만 한다고 되는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 난제가 체력과 시간이었다. 그래도 결심을 했으니 1/3은 완주를 한 것이고, 첫발만 내디디면 반은 성공한 것이라며 지나치게 긍정적인 마인드로 검토를 시작했다.

대략 15km 한 개의 코스를 하루에 걷는다고 해도 26일이 소요된다. 신혼여행도 아닌데 직장에 다니면서 한 달 가량의 휴가를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레길 종주는 팔자 좋은 중년들이나 체력 좋은 청년들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으로 홈페이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종주를 위한 체력과 시간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금세 찾아냈다.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시판에는 종주자의 소감과 사진이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몇 년에 걸쳐 올레길 완주에 성공한 것이다.

"아, 한 번에 다 걷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즉시 국가의 부흥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아닌, 나의 행복을 위한 올레 종주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올래 패스포트와 가이드 북을 주문한 김에 비행기표까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버킷 리스트에 뭘 자꾸 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풍경
▲ 제주 제주풍경
ⓒ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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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난해 10월, 나는 김포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아내는 나의 추진력이 놀랍다고 했지만, 바구니 안에서 꿈이 숙성되다 못해 상해버리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올레 16코스의 출발점에서 역사적인(?) 첫 스템프를 찍었다. 나와 아내가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종주라도 한 것마냥 호들갑을 떨고 있자 옆에 있던 부부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

"부러워요. 이제 시작하시나 봐요.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코스에요. 우리는 6년 만에 종주했어요."

아내와 나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고, 그들은 우리에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종주를 마칠 때쯤이면 저들과 비슷한 나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보다 더 근사한 출발이 있을까?

코스 중간 지점에서 스템프를 찍고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20대 초반의 청년 둘이 다가왔다. 나는 아저씨답게 "올레길을 걷고 있냐?"라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고, 청년들은 하루에 2코스씩 걷고 있노라 대답하며 우리의 일정도 물었다.

아내는 그들의 체력에 놀라며 5개년 계획을 말해주었고, 청년들은 우리의 장기 프로젝트 소식을 듣고 더 놀랐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청년들은 서둘러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올레길 위에서는 각자 다른 속도로 걷고 있지만 도착지는 동일하다. 

첫 번째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숨구멍이 하나 생긴 것처럼 호흡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얼마 전 해가 바뀌자마자 두 번째 올레길을 다녀왔다. 앞으로 5년의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어떤 이들을 만나고, 어떤 추억을 쌓게 될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기다려진다.

글의 마지막이 진부하거나 과장된 표현이라 비웃을 수도 있으나,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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