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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7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유물들이 대거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요지음 전주(全州) 시내 경기전(慶基殿)에서는 귀중한 국보의 도난사건이 이러낫다. 즉 이태조(李太祖)의 유품(遺品)인 용두검(龍頭劍) 두 개, 금(金)과 주석(錫)을 혼합하여 이면에 정묘(精妙)한 솜씨로 용문(龍紋)을 조각한 향로(香爐) 두 개, 향유 두 개, 촉대 四개를 비롯한 예술적 향기도 새로운 예술품을 지난 三월 二십七일경에 도난당하고 말었다."- 「李太祖 遺品 거이 盜難. 거지가 破損, 古物商에 賣却 等」, 『산업신문』, 1950.4.22.

얼마 가지 않아 범인이 잡혔다. 그는 고철들을 고물상에 팔아 연명하던 걸인 윤막동(尹莫同)이었다. 범인은 잡았지만 이미 훔친 유물들을 고물상에 팔아버린 뒤였다. 

범인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혹시라도 장물임을 알아볼까 불안했던지 훔친 유물들을 모두 파손한 뒤 진흙을 묻혀 원형을 알 수 없게 만들고 나서야, 전주시내의 한 고물상에 근당 150원을 받고 팔아치웠다. 장물인 줄 모르고 매입했던 고물상 역시 며칠 뒤에 다른 유기점에 근당 180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용두검을 비롯한 경기전 소장 태조 이성계의 유품이 도난당한 소식을 보도한 1950년 4월 22일자 <산업신문> 기사.
 용두검을 비롯한 경기전 소장 태조 이성계의 유품이 도난당한 소식을 보도한 1950년 4월 22일자 <산업신문> 기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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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도가 용두검은 아닐까?

범인도 잡았고 매각 경로도 파악했지만 이후 관련 보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잃어버린 유물들을 끝내 되찾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경기전의 유물 중에는 이성계의 유품인 용두검(龍頭劍) 두 자루도 있었다. 이후 용두검의 행방은 묘연하다. 불과 2개월 뒤 6.25 전쟁이 발발했으니 용두검을 찾으러 다닐 정신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용두검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전어도(傳御刀)가 용두검은 아닐까?'.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전어도라는 두 자루의 칼이 소장되어 있다. 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는 이 칼에 대해 '왕이 사용한 것이라 전해지는 칼'이라고 짧게 소개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전어도(傳御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전어도(傳御刀)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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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는 이 칼이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만들어 헌정한 칼이라는 설이 떠돌고 있다. 이에 따라 이성계가 등장하는 사극에서도 전어도가 종종 등장했다. 영화 <도굴>에서는 아예 이성계의 전어도가 스토리 전개에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전어도는 칼자루 끝이 용머리(龍頭)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어, 형태만 놓고 봤을 때는 용두검(龍頭劍)이라고 해도 맞아 떨어지는 모양새다. (원칙적으로 검은 양날의 형태, 도는 외날의 형태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구분 없이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전어도가 용두검일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 측은 "두 칼이 동일 유물일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전어도는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가져온 것으로, 고궁박물관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창덕궁 밖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던 용두검과 동일한 물건일 수 없다"는 것.

취재를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또 있다. 애초에 전어도가 이성계의 칼이라는 통설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전어도는 어떤 왕이 쓴 것인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며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만든 칼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한 전어도(傳御刀). 이성계(천호진 분)의 지휘도로 표현되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한 전어도(傳御刀). 이성계(천호진 분)의 지휘도로 표현되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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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에 전시된 운검 두 자루의 정체

그런데 작년 가을 경기전을 방문했을 당시 정전(正殿)에 걸린 태조 어진 앞에 두 자루의 칼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던 사실이 기억났다. 그 칼들 역시 칼자루 끝이 용머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전주 경기전 정전에 전시된 태조 이성계 어진과 두 자루의 칼
 전주 경기전 정전에 전시된 태조 이성계 어진과 두 자루의 칼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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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그 두 자루의 칼이 용두검은 아닐까 하는 마지막 기대를 품고 경기전을 관리하는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에 질의 민원을 넣었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날아온 회신은 실망스러웠다.

"해당 유품이 회수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회수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전 앞에 세워진 두 자루의 칼은 경기전의 구조 등을 기록한 <경기전의>(慶基殿儀)에 '운검(雲劒) 1쌍을 정전 안 정문 좌우에 세워둔다'고 쓰여진 기록에 따라 고궁박물관의 전어도를 모사하여 세워둔 모조품이라는 것. 운검의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어 전어도를 모사했다고 하니, 어쩌면 운검이 바로 용두검은 아니었을까.

이성계의 어검(御劍), 세상에 다시 드러나길

용두검이 실제 이성계가 썼던 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용두검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의장용으로 후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그러나 경기전에서 대대로 보관하며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성계의 유품이었을 가능성은 전어도보다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설사 이성계가 직접 쓴 칼이 아니라고 해도 역사적 가치를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혹자는 한국사의 3대 무기로 이성계의 '어궁(활)'과 이순신의 '쌍룡검', 안중근의 '권총'을 꼽으며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나마 세 유물은 실물을 촬영한 흑백 사진이 남아있어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반면 이성계의 용두검은 사진 등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그 형태를 가늠조차 하기 힘든 현실이다.

가장 안타까운 건 용두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도난 당시 범인이 원형을 알 수 없게 파손해버렸다고 하니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범인이 사실대로 진술했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용두검을 찾으려는 노력도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언젠가 이성계의 칼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면 바로 한국사의 성물(聖物)이자 국보(國寶)가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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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수료(독립운동사 전공) / 형의권·팔괘장·활쏘기(국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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